2025. 5. 13. 산정호수~열반곡
담벼락에 장미가 피었다. 여름이 건너오고 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참새의 애정행각을 본다. 부리를 서로 맞대고 뽀뽀를 한다. '아이, 눈꼴 시어라.' 혼잣말이었는데 들었나, 떨어져 앉는다. 분홍낮달맞이, 애기분홍낮달맞이 꽃도 피었다. 되지빠귀가 전깃줄에 앉아 또르릉 맑게 노래하고, 기와지붕마루에서는 백할미새가 단조로운 소리로 운다. 마을이 온갖 새소리로 떠들썩한데 커다란 꽃송이에서 홀로 떨어져 잎에 내려앉은 불두화 흰 꽃 한 잎만이 고요하다.
숲에 들어서자 때죽나무 꽃들이 달려든다. 실체보다 분분한 향이 먼저 그 존재를 알린다. 깊고 진한 향은 내 몸을 투과하지 못하고 들척지근하게 달라붙는다. 향기로 누군가를 죽이고 싶다면 혹은 눅진한 향에 누워 죽고 싶다면 진한 향을 독처럼 품은 초여름 꽃들이 다투어 피어나는 이 계절이 좋으리라.
때죽나무 하얀 별꽃이 하늘을 빼곡하게 가린다. 빽빽해진 녹음 사이로 맑고 고운 소리가 계곡 건너 숲에서 들려온다. 많이 들어본 소리인데 누구더라, 생각이 나질 않는다.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는 뻐꾹, 뻐꾸기 소리다. 뻐꾸기가 왔구나, 모내기철이 되었구나, 그립구나. 이상하게도 뻐꾸기 소리에서 매번 묘한 감동을 받는다.
하늘에는 때죽나무, 땅에는 국수나무 꽃길이 이어지는 숲을 걷는다. 간혹 땅에서 피는 붉은아까시나무 꽃 같은 땅비싸리가 숲에 연자줏빛 색을 입힌다. 요즘에는 작은 벌레들도 자꾸 눈에 들어와 걸음이 더 늦어져 큰일이다. 대개는 모르는 척 무시하고 지난다.
설잠교를 지나 산정호수 방향으로, 그 길에는 쪽동백나무가 있다. 한 번도 꽃피운 것을 본 적 없는 나무에 올핸 꽃잔치가 벌어졌다. 꽤 큰 나무인데 소나무 사이에 거의 눕다시피 기울어 자랐다. 애썼다, 참말 애썼다, 만개한 꽃을 보니 내가 다 흐뭇하다.
계곡에서 올챙이들과 잠시 놀았다. 톡 물을 건드리면 꼬리를 살랑이다가 죽은 척하거나 나뭇잎 아래로 숨는 게 귀엽다. 내게만 놀이이고 올챙이에겐 비상이려나.
고위봉에서 열반암 쪽으로 내려간다. 어떤 젊은 남자가 길도 아닌 곳에서 성큼성큼 나온다. 뭐 하는 사람인가 싶다. 뒤에서 넘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 돌아봤더니 멀쩡하다.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는 다시 성큼성큼 숲을 가로질러 걷는다. 이 무슨 영화 속 장면인가 했는데 그냥 현실, 그가 멈추더니 소나무 무덤에 약을 뿌린다.
소나무가 적은 이 길도 소나무재선충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무덤이 꽤 된다. "저기, 뭐 하시는 거예요?", "소나무재선충 감리하고 있어요." 궁금한 것을 이것저것 묻다가, "저 소나무들은 영원히 저렇게 두는 거예요?" 하니 이삼 년쯤 후에는 수거한단다. 나는 줄곧 보아왔는데 그러면 무덤은 계속해 새로 생겨났다는 것인가. 처음 만난 그와 숲의 미래를 걱정하다 헤어졌다.
길 한가운데서 어쩔 줄 몰라하는, 통통하여 새가 군침 흘릴 만한 애벌레를 숲 안쪽으로 옮겨 주었다. 죽더라도 사람 발에 밟혀 죽는 개죽음은 당하지 말라는 취지지만 이 또한 내 생각일 뿐 애벌레의 입장이야 알 길이 없다.
단풍나무 붉어진 열매를 보다가 날개가 3개, 4개인 기형(?) 열매를 보았다. 날개가 많아지면 더 멀리 잘 날 수 있는 걸까. 그러기를 바란다. 덩굴꽃마리인지 참꽃마리인지 헷갈리던 꽃은 잎 하나, 꽃 하나 순서가 확실하여 참꽃마리로 동정하였다(덩굴꽃마리는 줄기 끝에 꽃이 모여 핀다).
이 길을 수도 없이 다녔건만 새로운 사건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니 같은 길이었던 적은 없었나 보다. 거듭 반복되면 할 말이 없어서라도 글이 간결해지겠지 했는데 이렇게 또 길고 긴 일기를 쓰고 있는 걸 보면.
마을이다. 싸우는 듯한 새소리가 들린다. 노란빛 새가 숲에서 숲으로 날아간다. 꾀꼬리였구나! 나는 거칠고 땍땍거리는 암컷 꾀꼬리 소리를 듣고서야 아침에 들었던 맑은 소리의 주인공을 기억해 낸다. 꾀꼬리가 왔다! 더운 나라에서 온 빛깔 선명하고 화려한 꾀꼬리가 여름의 시작을 알린다. 꾀꼬리 노란빛이 숲에서 숲으로 뿌려지는 것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았다.
담장 밖으로 겨우 고개만 빼꼼 내밀어 애간장을 타게 하던 일본노각나무가 올해는 담장 위로 쑥 키를 키워 수줍고도 아름다운 꽃을 당당히 피웠다. 붉은 꽃받침 안에 든 하얀 꽃망울까지 선명하다. 살다 보니 이렇게 환하게 꽃 피워 반겨주는 날 있구나. 꽃잎 하나에 연지처럼 스민 옅은 분홍빛이 사랑스러워 가슴이 두방망이질한다. '요 며칠 깊은 밤 달빛이 곱더니 이곳 담장 아래에서 꽃잎을 직조하고 있었던 게야. 달빛이 피워내지 않고서야 저리 순정할 리 없지.' 꽃이 맑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