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5. 30. 영축산(백운암~비로암)
며칠 전부터 영알 능선이 아른거렸다. 아침에 눈을 뜨자 가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하게 등산 코스를 찾아보고, 영축산을 오르기로 한다. 이제 꽃은 지고 초록은 동색이 되어 나무들은 숲의 일부로 스며들어 보이는 건 온통 초록뿐인데 비탈진 곳마다 큰금계국 노란 꽃송이들이 말갛게 하늘거린다. 올해 유난하게 어여쁘다.
통도사 입구에서도 한참을 더 들어가 비로암에 차를 댄다. 비로암에서 백운암 들머리까지는 금방이다. 백운암까지는 나무 데크와 돌계단이 이어지는 오르막이다. 경주에서 볼 수 없는 나무가 있나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다. 부스럭 소리에 돌아보니 다람쥐다. 오랜만에 보아 반갑다. 나랑 발맞춰 조금 걸어준다.
드디어 경주 산에는 없는 알록달록 국방색 수피를 가진 노각나무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갓 꽃대를 내었다. 대개는 쭉쭉 뻗은 교목이라 꽃이 피어도 꽃 보기 어려운데 이곳의 노각나무는 키가 크지 않다. 꽃이 피면 내 눈높이에서도 얼마든지 꽃을 볼 수 있겠는데 언제 또 올지 몰라 마냥 아쉽다.
백운암에 도착하니 하얀 개가 멍멍 큰소리로 나를 맞아준다. 순하여 몇 번 쓰다듬으니 금방 꼬리를 살랑인다. 눈앞으로 능선이 펼쳐진 툇마루에 앉아 목을 축였다. 아, 이곳에 하염없이 앉아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초행길에 너무 오래 쉴 수는 없다. 깊은 산 높은 곳에 자리한 암자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약수 졸졸졸 떨어지는 돌수반에 방금 진 쪽동백나무 꽃을 몇 송이 띄운 후 다시 산을 오른다.
함박등까지도 오르막이다. 꽃 한 송이 없고 특별한 나무도 없고 조망도 없는 조금은 심심한 길. 그러다가 갑자기 큰 바위가 눈앞에 나타나고 그 바위를 오르니 드넓은 세상이 사방으로 펼쳐진다. 아, 좋다! 그저 나오는 환희의 감탄사 외에 달리 무엇으로 표현하겠는가. 초록 양탄자가 깔린 능선과 우뚝 솟은 바위와 산 아래에 펼쳐진 논밭과 사람의 마을과 싱그러운 오월의 햇살, 더 바랄 것 없는 기쁨이 샘솟는다.
함박등을 지나면서부터는 숲 아래에 여린 풀잎들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어 걷는 재미와 눈 맛이 쏠쏠하다. 아직 꽃대를 올리지 않은 여름 풀꽃들 - 꿩의다리, 단풍취, 일월비비추, 바위떡풀… 풀솜대는 꽃이 지고 있다. 오늘 함박꽃나무를 실컷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몇 그루 보지 못한 데다 이제야 꽃망울이 조금 통통해진 상태라 꽃 볼 마음은 접는다. 아쉬운지고.
완만해진 능선 길, 멀리에서 뻐꾸기와 검은등뻐꾸기 소리가 들려온다. 검은등뻐꾸기 소리를 숲에서 듣는 건 처음이다. 뻐뻐뻐꾹, 뻐꾹, 두 새의 합창에 내 귀는 그저 즐겁다. 어느 순간 검은등뻐꾸기 소리가 가까워져 그쪽으로 다가가니 소리를 뚝 멈춘다. 새들의 경계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부스럭부스럭 까투리 비슷한 새도 만났다. 오늘만 두 번째 만남, 새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는다. 그렇다고 곁을 내주는 것은 아니어서 멀찍이서 보았다. 암꿩이라 하기엔 꽁지 깃이 짧고 눈가에 검은 선이 있다(들꿩이었다. 들꿩은 산에 살고 산철쭉은 들에 산다).
저 멀리 영축산 정상이 보인다. 신불산 쪽으로 펼쳐지는 푸른 초원 같은 고원의 능선에 휘파람새의 맑은 소리가 간간이 깔린다. 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멀리서도 보일 정도로 시야를 가로막는 큰 나무가 없다. 그러나 금방일 것 같은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고 나는 걷고 걷고 또 걸어 정상(해발 1081m)에 닿는다.
정상엔 영알 9봉(1000미터 고지가 가 넘는 산) 완등을 인증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목적 없이 몇 년에 걸쳐 오늘로 7개 봉우리에 올랐다. 홀로 온 사람이 여럿이다. 사진을 찍어주고 비로암 가는 길을 묻는다. 그도 모르는 길을 지도 앱에서 상세히 보여주는데 나는 봐도 모르겠다. 대충 방향만 잡고 내려간다.
조금 내려가서 비로암 이정표를 확인하고 그 방향으로 쭉 내려갔다. 비법정탐방로가 되었다는데 길은 헷갈리지 않게 또렷하다. 가파른 돌길 내리막을 얼마쯤 내려가면 완만한 흙길 내리막이 한동안 이어진다. 나무 빽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는데 서어나무가 대세로 자리한 이 숲의 식생은 다양하지 않아 지루하다. 완만함이 소용없이 높고 큰 산은 오랜만이라 점점 다리가 아파 온다. 길은 심심하고 이정표도 없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가 없는데 때죽나무 꽃이 떨어진 것을 보고서야 산 아래쪽인가 하였다.
찌르레기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뾰족한 부리를 가진 새가 내게 돌진해 오다가 눈앞에서 휙 꺾어 나뭇가지에 앉는다. 내 눈 찌르러 오는 줄 알았다. 처음엔 우연인가 하였는데 또 그러는 것을 보면 나를 경계하는 것 같다. 주위에 둥지가 있나, 살펴도 알 수는 없다. 새끼가 있다면 부디 잘 키우거라, 서둘러 벗어난다.
끝 모를 길이 끝나는가 싶을 무렵 처음 만난 이정표가 아직도 900m 길이 남았다고 알려준다. 다행히 평지를 걷는 것 같은 둘레길이다. 욱신욱신 아픈 다리로도 걸을만하다.
드디어 비로암에 도착했다. 여유롭게 암자를 둘러보는 사람들이 부럽다. 나도 어디라도 앉아 조금 쉬었다 갈까 하고 둘러보는데 저 멀리로 파랗게 나는 새가 보인다.
"오, 파랑새다! "
은행나무 마른 가지에 내려앉는다. 아픈 다리는 잊고 부지런히 그쪽으로 간다. 그러나 눈치도 빠르지, 우아하게 날아 솔숲으로 숨어 버린다.
와~ 사진으로는 숱하게 보았지만 내 눈앞에서 나는 파랑새라니! 파랑새라니! 햇볕으로 땃땃하게 달궈진 소나무 근처 바닥에 앉아 파랑새를 기다린다. 부리와 다리는 붉고, 머리와 날개 끝은 검고, 몸은 청록색인 파랑새를 기다린다. 오지 않는다. 딱새와 오목눈이들만 왔다 갔다 한다.
파랑새가 소나무 뒤쪽으로 멀리 날아가는 것을 본다. 더 오래 기다리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 일어난다.
아, 나는 파랑새를 보았다!
* 파랑새 사진은 블로거 '우물' 님의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