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6. 5. 칠불암~통일전 임도
칠불암 가기 전 마을 길을 걷는 건 언제나 즐겁다. 담장 아래 초롱꽃이 흰 초롱을 밝혔다. 꽃줄기 뚝 따서 밤길을 걸으면 길이 환해질 것만 같다. 이름과 꽃이 조화로운 모습이다. 담장 따라 꽝꽝나무도 꽃망울을 조롱조롱 달았다. 꽃이 하도 작아 꽃핀 줄 아무도 모른다. 나와 벌만 안다. 한때는 나도 회양목이겠거니 하고 스쳐 지났었다. 어느 날 꽝꽝나무라는 것을 알아보고 엄청 반가웠더랬다. 회양목은 이른 봄에 꽃잎도 없이 피지만 꽝꽝이는 초여름에 앙증맞게 예쁜 꽃을 피운다. 알고 나면 그냥 지나질 수가 없게 귀여운 꽃이다.
무장다리 꽃이 쓰러져 보라색 나비 떼가 내려앉은 것 같다. 배추흰나비 한 마리 꽃 사이를 날며 흡밀 중이다. 산달래 꽃도 보라색 둥근 꽃볼을 활짝 피웠다.
대개 참깨 들깨 키우던 밭에서 머리에 양산을 들쓰고 두 손엔 나무 파티션을 든 여자가 키가 크고 줄기가 가는 식물에 지지대를 세우고 있다. 노란색 자잘한 꽃이 피어 있다. 허브식물 '딜'이라고 한다. "향이 좋죠? " 바람이 살랑 불자 향긋한 향이 난다. 좋다! 그러고 보니 구역을 나눈 밭에 각종 허브 식물이 심겨 있다. 밭주인이 바뀌었냐고 묻자 엄마 밭이란다. "밭이 더 예뻐지겠네요. 깨밭도 좋긴 했지만." 인사를 하고 걷는데 "깨밭도 좋긴 하죠"를 읊조리듯 거푸 말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참깨 꽃도 예쁘고 들깨 향도 좋은 것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길가의 산딸기 붉게 익어 몇 개 따먹었다. 달콤하다. 볕에 뜨겁게 익었는데, 태양의 맛이 이럴까 싶은, 뜨겁고 달콤하고 시원한 날것의 맛이 생생하다. 뜨거운 과일이 시원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맛이다. 더운 날 쨍한 볕에 익은 과일을 먹으면 시원할까 의심이 들겠지만 뜨거운데도 시원할 거라 장담한다. 그런 맛이다.
되지빠귀와 박새와 뻐꾸기와 꾀꼬리 소리가 들려오는 길을 걷는다. 모습을 못 보았으니 실제로 누가 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려니 짐작만 하는 것이지만 함께 걷는 기분이 좋다.
앞에 아무것도 붙지 않는 '씀바귀'가 자주 보인다. 여섯 장 꽃잎이 단출하다. 꽃에서 고졸한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홀로 있는, 산 속 나의 꽝꽝나무에도 꽃망울이 가득하다. 겨우 몇 송이 꽃을 내던 나무였는데 이런 날을 맞으니 아무것도 해준 것 없지만 내가 엄마라도 된 것마냥 기쁘다. 등로 가운데에 있어 사람에 치이는지 늘 비실비실했는데 살아남아 풍성하게 꽃을 피웠다. "장하다, 꽝꽝아!"
올해 나비는 작년에 비해 많이 태어나지 못한 것 같다. 작년에는 발길에 차이던 부전나비와 네발나비도 뜸하다. 그나마 오늘은 줄나비들이 제법 보인다. 내 주변을 맴도는 나비는 높은산세줄나비다(물론 집에 돌아와 눈이 빠지게 들여다본 후 동정했다). 맴돌다가 발아래 돌에 내려앉는다. 콧등에 맺힌 땀을 검지로 쓱 닦은 후 나비에 갖다 댄다. 빨대 주둥이를 도르르 펴 맛을 보더니 내 손으로 옮겨 온다. 팔을 가만히 들어 올려도 날아가지 않는다. 나비한테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 나는 또 괜히 으쓱해진다. 나비 중에도 인간 친화적인 나비가 있는 것 같다. 그런 나비를 만나는 것은 순전히 운이다.
오늘 나는 줄나비와 황세줄나비와 뱀눈그늘나비와 물결나비와 그리고 또 정말 많은 뿔나비를 만났다. 뿔나비는 자주 보아 나는 모른척하는데도 나비가 자꾸 내게 아는 척을 했다. 이런 날도 있어야 공평!
칠불암 아래 대안각 주변을 나도밤나무 꽃이 둘러싸고 있다. 꽃이 피면 하얗게 보일 텐데 아직은 연두색을 많이 품은 꽃망울 상태다. 대안각 마루에 앉아 농익어 떨어진 오디를 보며 입맛만 다신다. 뽕나무 키가 커서 손에 닿지 않는다. 칠불암 오르는 계단이 으깨진 오디로 까맣다.
늘 그렇듯 숨을 깔딱이며 계단을 올라 오랜만에 삼성각 문턱에 걸터앉아 산 건너를 바라보다 금오봉 가는 능선으로 향한다. 능선에서 보는 들판은 다양한 농도의 녹색 조각보를 이어 놓은 것 같다. 초여름 들녘의 풍경은 뜨겁지 않고 온화하다.
새머루에도 꽃이 폈다. 꽃잎이 다섯 장이라는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아무튼 수술만 있는 것 같은 꽃에서 열매 송이송이 열리는 것이 신기하다. 산포도라 불리기도 하는 새머루 열매는 먹을 수 있다는데 익은 열매를 본 적이 없다. 찜해둔 것도 가을에 보니 하나도 남아있지 않더라. 바람의 짓인지 새가 좋아하는지 알 수 없어도 매해 고운 단풍은 실컷 본다.
높은 바위 신갈나무 그늘 아래에서 오래 쉬었다. 바람이 시원하여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남산은 고향처럼 편안하다. 너른 바위도 많아 쉬기 좋은 곳도 참 많다. 오래 쉬어도 길이 짧아 시간에 쫓기지도 않는다. 세상엔 멋지고 좋은 산이 많고 또 많지만 내게는 남산이 최고다. 오랜 친구처럼 편안하다.
너무 편안하였나, 거미 한 마리가 몸속을 기다 소맷부리로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전화기가 데구르르 툭 바위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절벽이 아니라 길 쪽이라 내려가 주웠다.
내려오는 길에 드디어 키 작은 산뽕나무를 만나 열매를 따먹을 수 있었다. 그냥 뽕나무에 비해 삼분의 일이나 될까 한 크기지만 달콤한 맛은 최고다.
산 아래에선 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속을 메슥거리게 한다. 진짜 여름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