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귀는 나의 봄

2025. 3. 13. 오봉산

by 풀잎

낮이 확연히 길어졌다. 아침이 일찍 밝아온다. 산으로 가는 길이 노랗게 반짝인다. 드디어 산수유 꽃이 만개하였다. 나도 봄옷을 입었더니 몸이 한결 가볍다. 노루귀 한 송이 보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봉산에 간다.

유학사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곳에 노루귀 몇 송이가 보인다. 해는 아직 구름 속에서 늦잠이다. 햇살이 굼떠 오는 길이 더디니 꽃이 먼저 꽃잎을 열어 햇살을 깨운다. 낙엽 사이에 옹송거리고 있는 꽃들도 조만간 기지개를 켜고 꽃잎을 열 것이다. 산에 들자마자 노루귀를 보아 힘이 난다.


시끌벅적할 거라 생각했던 새들이 조용한데 진달래 봉긋해진 꽃눈과 개암나무 치렁치렁한 연노랑 수꽃 사이로 어디선가 '왜그래, 왜그래'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몰라, 나도 몰라' 답하며 소리의 주인을 찾아본다. 어, 이번에도 어치다. 어치는 마녀 웃음소리도 내고, 산까치라서 꺅꺅 까치 소리도 내는데, 다른 새 흉내도 잘 낸단다. 어치 서너 마리가 몰려다니며 구애를 하는 건지 싸우는 건지 한참 동안 숲이 소란했다. 그래서 '왜 그래'는 내가 묻고 싶어졌다. "너희들 왜 그래?"


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생강나무 꽃이 활짝 피어있다. 생강나무 흔해도 이 나무 한 그루만 꽃을 피웠다. 약간 경사진 곳의 내리막 숲에 아침 볕이 잘 드는 곳이다. 어느덧 해가 나오며 하늘도 파란 물이 들었다. 올해 첫 꽃이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안쪽으로 들어가 꽃내음을 맡는다. 생강의 톡 쏘는 알싸한 향보다 조금 무겁고 들큼한 향이 난다. 아무려나 좋다!


생강나무도 꽃을 피웠는데 그럼 올괴불나무도 꽃잎 열었어야지, 하고 보니 바로 근처에 올망졸망 꽃망울을 가득 단 올괴불나무가 보인다. 꽃잎을 연 꽃망울은 한 송이도 찾지 못했다. 다음 주면 절정으로 피어 예쁘겠다. 꽃색이 흐릿하여 꽃이 나무 가득 피어도 알아보기 어려운 올괴불나무다. 나는 이 꽃을 실컷 보아줄 것이다. '키 큰 나무들이 아직은 헐벗은 이때 부지런히 꽃을 피우렴. 무정차 역을 통과하는 기차처럼 바닥까지 햇살이 곧장 닿는 이때에.'


뿔나비
참개암나무 암꽃


산의 중턱쯤 왔을까. 노루귀 잎을 본 적이 있던 곳을 유심히 살피며 걷는데 꽃은 보이지 않고 나비가 보인다. 뿔나비다. 날개를 접고 있으면 낙엽이랑 구분이 되지 않는 뿔나비도 겨울을 성충으로 나나 보다. 매우 잽싼 나비인데 내 근처 낙엽 위에 앉더니 날개를 활짝 편다. 짙은 갈색 바탕에 밝은 주황 추상적인 무늬와 앞날개 끝에 세 개의 하얀 점이 있고 머리가 뾰족하다. 나는 오늘 주사암에 이를 때까지 꽤 많은 뿔나비를 보았다. 흔한 나비라 이리 이른 봄에 흔하게 만나니 그 흔함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 그 흔한 나방은 반갑지 않은 걸까. 큭큭.


보송보송 솜털로 덮인 이름 모를 새싹과, 능청스레 굴참나무 밑동에서 이끼 카펫을 깔고 앉은 꽃처럼 예쁜 솔방울과, 마른 잎 수북한 곳에서 초록색 도톰한 새잎을 낸 쑥부쟁이 싹과, 삐죽 꽃 같지도 않은 빠알간 암꽃을 피운 참개암나무와, 어쩌자고 벌써 꽃을 피운 샛노란 양지꽃과…… 이렇게나 성큼 온 봄 속을 걷는다.


봄이 반가운 것은 나보다 청서였을 것 같다. 이 산에는 침엽수가 얼마 없어 높은 곳에서도 숲 바닥이 훤히 보인다. 그 얼마 안 되는 소나무 아래에 일명 '숲의 새우튀김'이라 불리는 솔방울 고갱이가 수북하다. 배가 고픈 청서였을 것이다. 알뜰히 솔방울을 뜯어 놓았다. 아마도 새들처럼 씨앗을 쏙쏙 빼먹을 수가 없어 목질 비늘을 다 뜯는 것 같다. 앙상하게 남은 솔방울마저 왜 이렇게도 예쁜 걸까. 먹지 못하는 솔방울 새우튀김을 몇 개 주워 들고 산을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엔 생강나무 꽃이 더 많이 피어있다. 이쪽이 더 따뜻한 것 같지는 않은데 몇 시간 사이 꽃잎을 연 걸까. 그랬는지도 모른다. 산 아래에 거의 이르렀을 때 숲 안쪽 이곳저곳에서 키를 한껏 키운 노루귀가 꽃잎을 활짝 열고 나를 맞아준다.

'아, 어쩜 좋아. 너무 예쁘잖아!'

노루귀가 흙을 뚫고 피어나는 건지 내 심장을 헤집고 피는 건지 모르게 심장이 콩닥거린다. 이른 봄꽃 중에 가장 나를 설레게 하고 이 봄을 기다리게 하는 노루귀는 나의 봄이다. 노루귀를 몰랐을 때 나는 무엇으로 봄을 맞았을까. 까맣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나는 노루귀를 사랑하나 보다.


청설모가 뜯어먹은 솔방울(일명 숲의 새우튀김)
분홍 노루귀


월, 화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