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곤히 흐르는 강물 속에서 변하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by dropfairy

바람대로 되었던 걸까.


하얀 별자리들이 어둠을 삭히던 나의 붉은 땅을 나는 열아홉 해 동안 떠나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데 스물.


스무 살의 난 서울이 그리도 싫었어.


서울 밤의 화려한 조명도 사람들 얼굴에 내려앉은 빛의 자욱도 도무지 아름답지 않았어.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면 방금 전까지 내 눈에 생기를 비쳤던 모든 것이 신기루와 같은 허망한 꿈이 되어 어느새 사라질 것 같았어.


순간의 진실, 찰나의 열정, 거리에 내려앉은 구겨진 휴지의 무게보다 더할 것 같지 않았어. 변해버린 마음, 지켜지지 못한 약속, 의미 없이 버려진 쓰레기, 모두가 세상에 너무도 흔하게 존재하기에 서로 다를 이유가 없어 보였어.




스물. 그리고 하나.

강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되도록 많은 걸 갖고 싶었어. 그래서 슬픈 사람들에게 한없이 져주고 싶었어. 내가 보고 싶은 밝음을 난 그렇게 지키고 싶었어.

발바닥 전체에 딱딱한 못이 박혀있었어. 나의 오른손 세 번째 손가락은 매일같이 벌겋게 부어 있었어. 바쁘게 뛰어가다 잠시 걸음을 늦추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어.


새벽을 볼 수 있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어.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 '민들레처럼' 같은 민중가요에 심취해 있었지. 노랫말을 반복하며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는 제 한 몸만을 생각할 권리가 없다."라고 각인했어.




스물. 그리고 두울.

안경을 벗었어. 조심스레 옅은 화장을 했고 나의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말을 들었어. 열정적인 그러나 영원을 믿는 사랑을 했고 그 사랑이 주는 죽음보다 더할 것 같은 고통을 알았어.


그리고 나보다 앞서 산, 세상의 숱한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었어. 나의 고통을 이미 겪은 사람들, 그러면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아파한 젊은 날이 그려졌고 그날을 이겨낸 그들의 용기와 인내가 감동스러웠어.

세상이 달리 보였어. 차가웠던 도시의 빛에서 그 빛을 밝힌 이의 고단한 가슴이 떠올랐어. 내 곁을 스쳐간 무표정한 얼굴의 언 듯 비치는 미소에서 아픔을 지니고도 끝내 이겨보려 하는 힘겨운 노력이 느껴졌어.




스물. 그리고 셋, 넷, 다섯.

"세상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없다."


"곤곤히 흐르는 강물 속에서 변하지 않는 건 조약돌 하나도 있을 수 없다."라고 노트에 적어 놓았어.


시간을 늦추고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니 결국엔 이해되지 않는 게 없었어. 싫어했던 것, 참을 수 없었던 것, 용서할 수 없었던 것들이 하나씩 사라져 갔어. 그리고 나의 일상과 나의 사람들에게 감사하게 되었어.


멍이 드는 하루에도 '행복'이라는 단어가 스며들었어. 어쩔 수 없는 아픔에 어제는 눈물이 나도 오늘은 웃을 수 있었어. 잔인한 결과에 가슴이 찢겨도 후회는 없었어. 때문에 숨이 막혀오는 슬픔도 이내 가라앉고 내일엔 울지 않을 수 있었어.




2004년 가을의 난 내가 많이 강해졌다는 걸 알았어. 나이가 나를 이만큼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는 걸 알았어.

스무 살의 내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을 스물 하나의 나는 이해하고 있었어.

스물 하나의 내가 아직은 참아내지 못하던 것을 스물두 살의 나는 참고 있었어.

스물두 살의 내가 용서하지 못하던 것을 스물셋, 넷 그리고 다섯이 된 지금은 용서하게 되었어.

나이 먹는 게 싫지 않아. 나이가 들어 좀 더 넓고 보다 깊게 세상과 사람을 받아들이고 있을 내 모습이 기대돼.

나이가 재산이 되는 삶을 살고 싶어. 그러면 난 죽는 날 가장 큰 부자가 되겠지. 나이가 더해질수록 늘어나는 나의 재산이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작은 힘이 될 거야.

스물다섯의 난, 여전한 꿈과 희망과 용기와 그리고 예전에는 갖지 못했던 약간의 부유함을 가지고 있어.

때문일까? 나이가 들수록 나의 모습이 조금씩 아름다워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