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 인생의 건축물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의미로 새겨진다.

by 물 긷는 자 연지신


어이~ 춥다! 얼마 남았지?

11월 초. 이른 아침 차가운 공기.

모두 잔뜩 움츠린 채 차를 기다린다.

사람들 입에서 하얗게 뿜어 나오는 입김,

겨울이 벌써 왔다.


오전 7시 3분 통근버스 정류장,

아직, 서로 알아보기 힘들다.

잠시 어둠이 만든 독립된 공간.

편안함, 익숙함, 안도감 -

낯익은 사람을 향해

억지 눈인사라도 해야 하는데,

겨울이 면죄부를 줬다.


잔뜩 움츠린 희미한 어깨들.

저쪽 구석에서 은은히 풍기는 군고구마 냄새 -

마음이 녹았다.


5분.’

버스는 정해진 시간에 도착해서,

사람들 싣고 약속된 장소로 옮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기다림 -


기다림은 상황에 따라 다른 색깔이다.

대개 의미를 상실한 지루함, 회색

때로는 버거운 고통, 검은색

지속되기 바라는 작은 소망, 연두색

불현듯 설레는 미지의 약속, 분홍색으로 나타났다.


기다림은 변화무쌍한 이율배반이었고,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되기도 했다.


버스가 때맞춰 왔다. 순서를 양보했다. 되도록 뒷줄에 앉아 나만의 공간에서 격리되고 싶었다. 이제 곧 떠밀리듯 합류될 테니까…

버스에 몸을 싣고, 여느 때처럼 맨 뒷자리 오른쪽 창가에 기대앉았다. 여기선 자리가 정해져 있다. 암묵적 동의였다.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선 각자의 목적지를 향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지만, 이 버스 안은 충분히 넉넉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위안이자 자부심이었다. 그래서 그들 양복 왼쪽 깃에는 회사 배지가 항상 달려 있다.

계급을 상징하는 호패였다.


주변에서 웅성거린다. 희미하게 눈을 껌뻑였다. ‘아니… 벌써?!’ 흩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몇 번 뒤로 넘긴다. 몽롱한 정신을 되돌리려는 분투로 보였지만, 무의식적 반항, 앞선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한다는 잠재된 불안이었다.

바깥이 환해졌다. 딴생각 말고 뒤처지지 말라는 재촉 같다.

웅장하고 짙은 자주색 고층 건물을 향해 총총히 걷는다.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해야 한다. 그곳에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환영하지는 않는다.


1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입구. 땡 하는 기계음과 동시에 문이 열리면 우르르 올라탄다. 이제부터 양보하지 않는다. 출발 총성이 울렸으니, 앞만 보고 전력질주 해야 살아남는다.

8시 10분. 아직 20분이 남았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 있다.


이곳에 아프리카 대 초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떼 지어 몰려다니는 초식 동물, 이들은 언제든 먹이가 될 운명이다. 무리를 떠나 배회하는 방랑자, 사냥감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포식자.

동물의 왕국. 여기선 초식 동물이건, 육식 동물이건, 보이지 않는 곤충마저 쉼 없이 먹잇감을 사냥한다. 이곳 생물들은 배부름을 몰라야 한다.

배고픔이 미덕. 자연법칙과 전혀 다른 방식.

시간이 지나면 적응하는 자와 도태되는 자로 나뉜다.





회사가 어려우니, 양해 바랍니다.

입사 5년 차 대리인데 아직 후임이 없다. 회사에선 갑자기 닥친 불황으로, 여력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지금까지 불황 아닌 적이 있었나?'

사실, 먹잇감은 그대로인데 포식자가 늘었다. 돈이 된다 싶으니, 여기저기서 뛰어들어 경쟁이 극심해졌다. 이제는 몇 회사가 쓰러져야 겨우 살아남을 수 있게 돼버렸다.

회사나 사람 심지어 동물들도 늘 같은 일을 반복하며 자기 방식대로 상황을 모면한다. 룰과 법칙은 점점 실종된다.

되풀이되는 일상이 우연한 사건에 의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틀어져,

그게 길이 된다.


아침 방송이 끝나면 회사 노래가 나온다. 멍하니 있다가도 일어나야 한다. 소속감과 유대감을 공유하려는 거지만, 큰 의미는 없다. 결국 우리는 목초지를 찾아 잠시 머물다 떠나는 유목민이었다.

부서별로 스탠딩 미팅을 갖는다. 말만 미팅일 뿐, 지시가 하달되는 자리다. 여기선 말없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일사불란이 최고의 미덕이다. 의문이나 질문, 다른 의견을 개진하면 자칫 불경으로 여겨진다.


미팅을 주관하는 과장들은 전투부대 소대장들이다.

“자, 이제 월말이다. 바짝 긴장해서 확 당겨 보자고. 우리 파이팅 한번 외치자” 격려보다 어떡해서든, 실적을 올리라는 압박이다. 회의가 끝나면 대부분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로 간다. 과장이 물어보면 대답 거리는 찾아야 하기에 여기저기 전화를 건다. 그리고 약속을 잡고 밖으로 튕겨져 나간다. 한 건이라도 올리면 좋지만, 그리 간절하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깝지도, 소중한지도 몰랐다.

옆자리 동기 녀석이 사무실이 떠나가라 통화한다.

“사장님, 언제 오더 하실 거예요? 제가 이달 실적이 엉망이에요. 미리 앞당겨 주세요.”


남에게 보이려고 한 건 아니다.

그러면 지속할 수 없었겠지.

좋아서 한 게 맞다.

실적도 탁월했다.


그는 나중에 회사를 차렸는데 몇 년 안돼, 중견 기업 수준으로 커졌다. 그에겐 이런 회사 생활이 큰 의미였다.


나는 영업 기획을 담당했다. 1개월, 3개월, 6개월 단위로 판매 계획을 수립했다. 심지어 1년 계획도 세웠지만 예상은 언제나 빗나갔다. 계획을 세웠다기보다 위에서 희망하는 숫자를 나열한 거였다. 그저, 그때그때 넘기면 됐다.


오후 6시.

과장들은 회사가 더 편한지 집에 갈 생각을 안 한다.

그 익숙함이 편해졌을까?

내겐 무료한 기다림이었다.

벗어나고 싶었지만 정적을 깰 용기가 없었다.

때마침 과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반가왔는지 주섬 주섬 챙기더니 곧장 나갔다.

그가 나가자 사무실 분위기가 덩달아 환해지고

이야기도 많아졌다.

잠시 후 남은 자들도 어디론가 향했다.

10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같은 부서 혁수와 1차를 마치고 2차로 향했다.

그와는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그냥 끝나기엔 아쉬웠을까? 아니면 우린 끝까지 함께 한다는 동지애였을까? 아니면 남자 다움을 드러내는 객기였을까!

다음날 속이 불편해도 습관처럼 자꾸 집어넣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못했다.


2차는 언제나 호프집으로 향했다. 종로 거리를 비틀 거리며 걷다가, 그의 1년 과선배와 우연히 마주쳤다. 과는 달랐지만 그도 내 선배였다.

둘 다 일면식도 없었지만 익숙한 척 인사를 주고받으며 명함을 교환했다. 이것은 신분을 확인하는 통과의례였다. 일단 서로 엇비슷하다 인정되면 선후배 관계는 곧바로 카르텔이 됐다.

선배는 메이저 TV방송국 계열, 광고 대행사 차장이었다. 혁수가 정색을 하고

“형, 좋은데 다니네. 자리 나면 소개해줘.”

“니 증말이가? 내 꼭 연락한다”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화답한다.


선배와 헤어져, 호프집에서 혁수에게 물었다.

“넌 동기들 중 제일 잘 나가는데, 왜 떠나려고 해? 사장까지 하면 좋잖아?”

“한 5년 해보니, 여긴 아닌 것 같아. 재미없어.”

그는 재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재미란 무얼까? 의미가 없다는 다른 말일까?


나도 벗어나고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오늘 처음 본 사람에게 부탁한다는 게 우습기도 했고, 거절에 대한 망설임이 컸다. 구차해 보이기도 싫었다.

인연이 닿으면 어떻게든 이어지겠지.


며칠 뒤, 혁수는 선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미련 없이 떠났다. 이젠 나도 그에게 같은 부탁을 했다. 현실로 다가오니 간절해졌다.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혁수에게 전화가 왔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목소리까지 떨려 침을 삼켰다. 마음이 먼저 가 있었다.

기대는 사라질 무렵 현실이 되어 찾아왔다. 내가 기다리는 동안, 세상은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왜 떠나고 싶었을까?

그곳에 의미가 없었다. 의미를 찾지 못하면, 어디든 감옥이었다. 탈출하고 싶었다.

빠삐용. 쇼생크 탈출...





축하합니다. 서류 심사가 통과됐습니다.
사장님 면접을 보셔야 합니다.

지원한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날짜와 시간은 일방적이었다. 사장 면접이라 내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월차를 냈다. 마음이 떠나니 일에 대한 관심도 현저히 떨어졌다. 아마 과장은 직감했을지 모른다.


당시엔 서류만 통과되면, 면접은 당락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다. 사람보다 종이에 적힌 이력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겼다. 이것은 출신성분으로 평생 쫓아다녔다.

나는 단지 큰 회사에서 영업 기획을 했다는 이유로 광고 기획 부서로 내정돼 있었다. 하긴, ‘집에 사진기 있는 사람?’ 하길래 손 들었더니, 사진병으로 차출됐으니까.


똑똑똑! 인사 담당 임원이 조용히 사장실 문을 두드리며, 나를 안내했다. 낯이 많이 익어 나도 모르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생각해 보니 그는 TV 방송국 메인 앵커로 꽤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 양반, 정치에 관심이 많아. 여러 번 정치권 문을 두드렸는데 잘 안 됐어. 회사 일엔 별 관심 없어” 면접 보기 전, 혁수가 귀띔했다.


그가 소파에 앉더니 내 서류를 들춰보며 이것저것 물었다. 뻔한 질문이었다.

“지금 다니는 곳도 좋은 회산데, 왜 지원했나요?” “우리 회사 광고 중에서 어떤 것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나도 의례적으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가 뜬금없는 질문을 툭 던졌다.

“어떻게 생각해요?”

며칠 전 사병이 장교를 폭행해서, 사회적으로 파장이 꽤 컸던 사건에 대해 물었다. 그의 미간이 약간 움직이며 나를 보았고,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내 대답으로 사상 검증을 하려 했다.

'이 대답으로 당락이 결정된다. 사장이 무슨 답을 원할까. 여기선 이게 진리다.' 순간 머릿속이 계산기처럼 팽팽 돌아갔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휴…’ 그가 원했던 정답이었다.


만일, 당락에 관계없이 그 질문을 받았다면 어떻게 대답했을까? 역시 같은 말을 했을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변치 않는 가치로 세상이 유지된다.’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전화를 받았다 ‘합격입니다. 언제부터 일 할 수 있어요?’

‘또 재촉한다…’


인생은 우연으로 세워지는 건축물

어떤 것은 건물을 받쳐주는 기둥,

어떤 것은 투명한 통유리창,

앞에 나타나기도,

뒤에서 다른 역할을 한다.


나는 이것들은 단지

주어진 공간에서

이리저리 옮기며

배치하는 일만 하는 걸까?


우연의 의미를 미리 볼 수 있다면, 좀 더 제대로 잘 놓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우연은 기다림의 끝자락에,

의미로 삶의 곳곳에 새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