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타스

내 가까이 있는 것들

by 쵸코 아빠

진짜 재치는 웃음을 넘어, 사람을 따뜻하게 만든다.


아침 산책길에 우연히 본 자동차 스티커 하나가 나를 멈춰 세웠다.

‘아기타스.’

익숙한 스포츠 브랜드 로고를 살짝 비튼 문구였다. 보통은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는 다소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표현이 붙어 있기 마련인데, 이 문구는 단 한 글자만 바꿔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어냈다. 웃음이 났고,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의 하루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 대신, 작은 유머를 얹어 놓은 배려 같았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오래 기억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재치를 지니고 있었다.

신입사원 시절, 지방 순회 연수를 마치고 숙소에서 선배들과 맥주 한 잔을 하기로 한 날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모두 긴장과 피로가 뒤섞인 얼굴이었다. 한 동기가 근처 매점에 다녀오겠다고 나섰고, 잠시 후 캔맥주와 안주를 들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소주는 없고, 종이 소주잔만 몇 개 더 들고 있었다.

“소주도 안 마시는데 소주잔은 왜 샀냐”는 질문이 나오자,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안주 찍어 먹을 마요네즈 담으려고요.”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그는 튀지 않았다. 그렇다고 조용하지도 않았다. 필요할 때 분위기를 읽고, 모두를 편안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1년 뒤, 그는 그룹 모기업으로 발탁되었다. 그 결과가 전적으로 ‘재치’ 때문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나는 여전히 그날의 장면을 떠올린다. 조직이 원하는 사람의 모습이 무엇인지, 그 안에 어떤 결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 세대의 감각은 훨씬 더 빠르고, 다채롭다.

‘피지컬’에서 파생된 ‘뇌지컬’, ‘무지컬’, 밥을 먹으며 넷플릭스를 본다는 뜻의 ‘밥플릭스’. 이런 단어들은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그 안에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자기 삶을 해석하는 태도가 담겨 있다. 이들은 기존의 언어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비틀고 재구성한다. 언어를 놀이처럼 다루지만, 그 놀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웃음 속에 시대의 감각이 숨어 있다.


그러나 센스와 재치가 언제나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요즘 사회는 관계보다 이익을, 진심보다 효율을 우선시한다. 그 속에서 재치는 사람을 웃게 하는 능력이 아니라, 사람을 속이고 조종하는 기술로 변질되기도 한다. 보이스피싱이나 각종 사기 범죄를 보면, 상대를 속이는 언변과 상황 연출을 마치 ‘능력’이나 ‘영업력’처럼 여기는 태도가 엿보인다.

이때의 재치는 더 이상 공동체를 따뜻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뢰를 갉아먹고, 사람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세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재치의 본질을 말하며 ‘좋은 판단력’을 핵심으로 꼽았다. 재치는 단순히 말을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언제 말하고 언제 멈춰야 하는지를 아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상황과 맥락, 그리고 상대를 고려한 판단이 빠질 때 재치는 곧 경박함이나 기만으로 변한다. 공동체와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는 방향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그것은 미덕이 된다.


동양에서도 비슷한 가르침이 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교언영색(巧言令色), 선의인(鮮矣仁).”

꾸며진 말과 표정에는 어짊이 드물다는 뜻이다.


말재주가 뛰어나고 표정이 능숙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심 없는 말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사람을 떠나게 만든다. 센스 역시 마찬가지다.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재치는 순간의 박수를 받을 수는 있어도, 신뢰를 남기지는 못한다.


재치가 진짜 힘을 가지려면 그 안에 배려와 품격이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라는 감각이 필요하다.

요즘 ‘우리’라는 말은 점점 어색해지고 있다. 개인의 성취와 효율이 강조되면서, ‘우리’가 ‘나’에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넓히면, ‘나’는 언제나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언어도, 문화도, 안전도, 제도도 모두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일제강점기의 국민들, 유럽의 유대인들처럼 ‘우리’라는 이름을 빼앗긴 순간, 사람들은 가장 깊은 고통을 겪었다. 개인은 공동체 없이 홀로 설 수 없다는 사실이 그때마다 증명되었다.


그래서 ‘아기타스’라는 작은 스티커가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그 문구는 누군가의 창의력과 유머를 보여주는 동시에, 타인을 향한 배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경고 대신 웃음을, 명령 대신 공감을 건네는 방식. 그런 재치는 사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루의 긴장을 풀어주고, 낯선 타인 사이에 잠시나마 따뜻한 연결을 만든다.


‘아기타스’처럼 작은 유머 속에도 따뜻함이 깃들 수 있다면, 그 재치는 우리의 하루를 밝혀주는 빛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를 빛나게 하는 순간, ‘나’ 또한 그 빛 속에 함께 서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