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독서모임 창립멤버를 모집합니다.

by 김재희

1. 책이 필요해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할 때면 집을 나서기 전에 선반에서 책을 한 권 챙겼다. 아침 공기, 손에 이끌려 고른 책 한 권. 책을 들고 학교로 걸어가며 한 줄이라도 읽으면 나에게 아직 자유 의지가 있다는 걸 느낀다. 매일 똑같은 동기 80명과 똑같은 교실에 하루종일 갇혀있으면 종종 책이 필요하다.



2. 독서모임이 필요해

어느 날은 동기 오빠들과 밥을 먹다가 이번 학기 목표가 책을 읽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런 훌륭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이번 학기에는 함께 책을 읽어보자고 했다. 그렇게 일주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흘러갔다.



3. 그러나 난 다 계획이 있었지

책치? 어감은 마음에 드는데. 책 읽는 치대생이라는 모임명은 우리를 너무 전공이라는 틀에 가두는 것 같았다. 나는 가두어지는 일은 더 이상 아주 질색팔색이다. 공강 시간에 도서관 구석에 앉아 피피티를 켜서 홍보용 포스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책처럼 활자로만 구성된, 글 읽기 좋아하는 사람만 주의 깊게 읽어볼 만한 디자인. 글꼴은 예전에 시집에 쓸 만한 무료 폰트를 찾으며 저장해둔 Kopub바탕체를 골랐다. 아냐 그래도 책치는 너무 답답하다.

내가 원하는 독서모임은 다음과 같은 모습이었다.

1. 자유로울 것. 모든 종류의 책은 존중받아야 한다.

2. 학과 내 독서문화 증진에 도움을 줄 것. 책을 읽던 사람은 더 읽고, 안 읽던 사람은 읽기 시작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줄 것.

3. 책 읽는 사람들끼리의 커뮤니티를 만들 것.



4. 모집해요

등굣길에 프린트카페에 가서 60원을 내고 포스터를 흑백인쇄했다. 아무도 없는 이른 시간에 몰래 교실 뒤 게시판에 홍보지를 붙이려고 했으나 아뿔싸, 과제에 한 문제가 더 있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허겁지겁 과제를 마무리하고 나니 출석을 부르기 일보직전이었다. 과제를 내러 뒤로 가며 슬쩍 게시판으로 갔다. 모두가 정신없는 틈을 타 게시판 한 구석에 핀으로 종이를 고정했다.


중앙에 큼직하게 배치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급 소심해진 나는 커다란 에어컨에 가려질듯 말듯 구석에 꽂고 돌아와버렸다. 아무래도 내 이름을 걸고 '나 책 읽어요~' 자랑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수업을 들으며 세심하게 주위를 살피는 사람만이 보는 것도 좋겠다고 합리화를 했다.



5. 모집하는데요

첫 쉬는시간 10분, 누가 뒤를 지나다니는지 누가 게시판에 관심을 보이는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너무 소심하게 꽂았나? 아무도 못 보고 지나갔나? 수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나랑 안 친하거나 민망해서 직접 말을 안하는 것일 수도 있다. 또는 고민을 해보고 나중에 알려줄 수도 있다. 아니면 아무도 관심이 없나? 너무 나댔나?



6. 점심 시간 이후에도 묵묵부답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점심을 먹고 와서 한시 수업이 시작되었는데 나의 카톡은 잠잠했다.


한시 육분 경. 한 언니가 포스터 사진을 찍어 나에게 보내왔다. 들어오고 싶단다!! 거의 동시에 그 언니와 친한 과대 언니에게도 가입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독서 모임을 모집하지 않았으면 그 둘이 책을 좋아한다는 걸 절대 몰랐을 것이다. 과에 숨어있던 독서 동지들을 벌써 두 명이나 발견해서 기뻤다. 독서모임 열길 잘했다!



7. 수업 교재만 읽어도 가입이 되나요?

오후가 되니 독서모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서 하나 둘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걸 보더니 옆자리 오빠가 대뜸, 해부학, 재료학 같은 교과서만 읽어도 가입할 수 있냐고 물어보았다. 모든 종류의 책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나의 독서모임 철칙 1번에 따라 나는 고민도 없이 물론 된다고 했다. 독서모임에 들어와서 다른 책도 읽기 시작하면 더욱 좋은 것 아닌가! 절대 한 명이라도 더 받고 싶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쉬는 시간에도 꽤 많은 사람이 내 포스터를 보고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가입을 망설이는 동기 언니에게 어필하기 위해 어떤 책이든, 심지어 책을 아직 거의 안 읽어도 괜찮다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 교과서만 읽는 오빠를 팔았다. 그 정도로 자유롭다는 의미였지만, "그건 너무 양심없는 거 아냐? 탈락시켜!"라는 대답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절대 이때쯤 되니 사람이 충분히 모여서 그 오빠가 필요없어진 것이 아니다!



8. 당신 독서에 진심인가요?

저녁을 차려먹고 독서모임 카톡방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교과서만 읽는 오빠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이상한 오빠는 어떤 수업 시간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필기를 하고 있고, 그 다음 시간에 보면 기숙사에서 게임용 노트북을 따로 가져와 롤토체스를 하고 있다. 방학에 다 같이 놀러가는 길에 갑자기 교과서를 읽고, 남들 다 공부할 땐 또 공부를 안 한다. 이 사람 정말 교과서 읽기가 '취미' 맞나?


처음 가입 이유를 물었을 땐 교과서도 감동과 재미가 있다고 했다. 학교가 끝나고 성적과 무관하게 정말 재미를 위해서 읽을 수 있냐고 재차 물었다. 그렇다 했다. 교과서를 보면 교수님마다 같은 내용을 어떻게 다르게 해석하는지 보는 게 재밌단다. 그제서야 그의 기행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 사람 공부는 재밌지만 시험을 잘 보려고 공부하는 걸 싫어하는군. 당신이 한 말이 진심인 것 같으니 환영한다. 그렇게 나의 독서모임에 총 9인이 모였다. 평소 같이 다니는 무리들과는 전혀 딴판인, 아주 이색적인 조합의 멤버로 구성된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9. 드디어 시작!

안녕하세요, 장르 불문 부담 없는 치대 독서모임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독서모임은 제가 책을 혼자서만 읽다보니 외로워서, 치대 내 독서문화의 활성화와 꾸준한 독서를 위한 동기부여를 위해 만들었습니다.

저희의 활동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개인별 독서목표 설정: 이번 학기 동안 달성하고 싶은 목표를 설정합니다. 첫 독서인증을 하실 때 사진과 함께 목표를 올려주시면 됩니다.
� 독서인증: 책 읽는 인증샷, 독서기록앱, 메모, 인용 등 자유로운 형식으로 독서 인증을 남깁니다.
*참고로 저는 ‘북적북적’이라는 앱을 애용합니다(한국어 지원됨).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간편한 인터페이스가 장점이고, 책이 쌓여가는 걸 보면 기분이 좋습니다ㅎㅎ
� 책을 열심히 읽다보면…소정의 상품이 있을수도?
� 여러분의 아이디어를 기다립니다. 책 한 권을 정해 함께 읽는 소모임, 독립서점 투어, 독서 행사 가기, 청계천에서 책 읽기 등등 하고 싶은 활동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 톡방 사용 설명서
독서 인증 외에도 자유롭게 대화하시면 됩니다.
질문, 책 추천, 감상평, 정보 공유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내가 나서서 소모임을 만든 것은 인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동기들이 나와 함께해주었고, 감사하게도 꾸준히 독서 인증글을 올려주고 있다. 첫 시작은 답답한 일상으로부터의 도피였지만, 이제는 그 도피처가 내 일상 내부에 자리잡았다. 나의 원대한 꿈은 이 모임을 잘 굴려서 정식 동아리로 확장시키는 것이지만, 그 일은 아직 멀고 멀었으니 오늘은 이 글을 끝으로 오늘의 독서를 하고 잠에 들어야지.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