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일과 기형도 시인 외 여럿
김승일의 시집(여기까지 인용하세요)를 다 읽었다. 시험이 2주 앞으로 다가왔다. 집에는 아직 반도 안 읽은 인문학 대출도서가 누워있지만, 병렬독서를 한다는 핑계로 새로운 시집을 찾아나섰다.
학교 치의학 도서관의 시집 목록은 대단히 제한적이지만, 그만큼 책장 한 칸에 한국 시 세계의 액기스만 뽑아둔 것이라 긍정해본다. 나태주 시집, 흠…내 취향은 아니다. 기형도의 유일한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을 빌려 실습실로 신난 발걸음을 옮겼다.
기형도 시인은 이름처럼 시도 기형적이다. 칭찬이다.
나는 자기혐오가 심한 사람이 아니지만 자기혐오적인 시를 좋아한다. 나 자신은 스스로를 사랑하고 아껴주면서 왜 자기혐오적인 시인을 좋아할까? 투우장 안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소를 구경하는 관중의 심리인가? 기만? 나는 안전한 울타리 안이 좋지만 지루한 건 싫어서?
아무튼지간에 감정 절제를 못하고 우울과 자기혐오로 가득한 시도 싫지만, 선비같은 시인도 영 내 취향이 아니다. (자기는 뭐 언제나 떳떳한 사람인가? 재수없는 자식. 독자에게 삿대질이나 하고 말이야-라는 식의 비뚤어진 생각부터 든다)
다음은 이러한 자기혐오시인사랑증후군에 대해 스스로 진단을 내려본 결과이다.
1. 스스로를 혐오스럽게 여기는 시인은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스스로를 비겁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가장 용기 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흠을 책으로 펴내는 사람이라니, 얼마나 멋있는가!
2. 자기혐오는 사랑보다도 보편적이다. 스스로를 혐오해보지 않고 사춘기를 지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되겠는가.
사랑은 따지는 게 많다. 꼭 두 사람이 필요하다. 아무 사람이어서도 안되고, 어디선가 들어맞아야 하고. 사랑을 하고 싶다고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 해보고 싶어 시작한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한 때 사랑이라 생각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랑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사랑을 정의내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사람의 취향을 탄다. 불 같은 사랑, 점진적인 사랑, 차가운 사랑, 물질적인 사랑, 플라토닉한 사랑.. 나의 정서에 맞는 사랑시를 찾는 것은 사랑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3. 반면 자기혐오는 쉽다. 당신이 십대 청소년이거나, 안 좋은 일을 겪거나, 과민하거나, 시끄럽거나, 조용하거나, 어떤 이유로든 자기혐오는 시작된다. 노력할 필요도 없으며 함께 혐오해줄 타인을 구할 필요도 없다. 나이건 너이건, 비슷하게 생겼든 다르게 생겼든, 살아온 환경이 같든 다르든. 정반대의 이유로도 똑같이 나를 혐오할 수 있다.
결론
나의 자기혐오적 시인 사랑 증세는 원인이 명확한 것으로, 자기혐오시인사랑증후군이라 할 수 있다. 증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이 글의 계기가 된 기형도의 시를 첨부한다.
오래된 서적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