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넘어짐의 해부학

넘어진 김에 인공지능과 공부하기

by 김재희

치대생이 머리 해부학만 배운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의대생이나 간호대생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전신을 배운다. 난 해부학이 재미있어서 이번 학기의 해부학 필기 담당을 맡았다.


어젯밤 샤워를 마치고 자취방 화장실에서 거하게 미끄러졌다. 주변에 잡을 것 하나 없는 채로 주욱, 문가 턱에 팔을 찧으며 쓸려내려갔다. 벌떡 일어나 거울로 살펴보니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머리를 박고 정신을 잃지 않아서 다행이지. 욱신거리는 팔을 무시하며 블라우스 손빨래를 마저 끝냈다. 손에 힘을 줄 때 팔이 특히나 아파 물을 짜내는 일이 꽤 힘들었다. 아래팔이 새끼손가락 쪽 면을 따라 딱딱하게 부어올랐다.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걸 보니 뼈에는 이상이 없다. 그렇다면 근육인가? 잠깐만,


이 참에 해부학 공부하면 완전 재밌겠잖아!!!


전신 해부학을 배우는 중에 화장실에서 적당히 아프게 넘어지는 건 흔한 기회가 아니다. 팔의 구조물을 보고 '아 이거, 내가 다쳤던 부위!'라는 기억이 떠오르면 어찌 그 이름과 위치, 그리고 기능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내 지적 호기심이 이까짓 통증보다 한 수 위였다. 온몸의 저릿저릿한 감각은 점차 짜릿함으로 변해갔다.


그러나 팔이 너무 붓고 아팠기 때문에 우선 찜질을 해야 했다.

나의 해부학 친구 지피티에게 냉찜질을 해야할지 온찜질을 해야할지 물어보았다.











오케이 냉찜질. 지퍼백에 얼린 물을 수건으로 감싸 팔에 단단히 고정해주었다. 남자친구에게 미끄러져서 팔을 다쳤다고 영상통화로 징징거려준 다음, 한쪽 팔이 불구가 되었기 때문에 음성 기능을 이용해 제미나이에게 궁금했던 걸 물어보기 시작했다.


나: 화장실에서 넘어졌는데 팔이 너무 아파.





G: 어머, 정말 아프겠다. 그치만 나는 의사가 아니라 조언은 줄 수 없어.








이럴 때 나만의 꿀팁은, 해부학을 공부하는 학생인 티를 팍팍 내는 것이다. Ulna* 같은 해부학 용어를 섞어주면 제미나이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알려준다.


* 여기서 Ulna(자뼈)란?

두 가닥의 아래팔뼈 중 좀 더 큰 뼈라고 생각하면 된다. 위치는 새끼손가락 쪽이다.

출처: Wikipedia


나: 그치만 어떤 근육, 아니면 어떤 인대가 다친건지 궁금한걸? ulna뼈 바깥쪽, 2/3 지점 정도가 아파.






G: 좋은 질문이야. Ulnar 쪽에는 중요한 근육과 인대가 꽤 있어. 손목을 굽히게 해주는 flexor carpi ulnaris나 팔꿈치를 안정화하는 인대같은 것들일 수 있겠다.


이러고 나서 내가 묻는 말에 제미나이가 제대로 대답을 해주지 않아 약간의 언쟁이 오고갔다.


나: 아니 그쪽이 아니라고. 그리고 새끼손가락을 움직일 때 더 아픈 것 같아.





G: 알겠어. 새끼손가락을 움직일 때 더 아픈 거면 flexor digitorium profundus muscle일 수 있어. 손가락의 가장 끝 관절을 구부릴 때 관여하거든.

나: 주먹(fist) 꽉 쥘 때도 아파.





G: 좋아, 그건 flexor digitorium profundus나 flexor carpi ulnaris일거야.



어떤 근육이 다친 건지 견적이 나오기 시작했다.

(좌) flexor carpi ulnaris, (우) flexor digitorium profundus [출처: Gray's Anatomy]

용어가 어려워보이지만 하나하나 풀어보면, 손목(carpus)과 자뼈(ulna)에 붙는 굽힘근(flexor)과, 손가락(digit)을 굽히는(flexor) 깊은(profound) 근육이라는 뜻이다. 손가락, 특히 새끼손가락을 굽힐 때 통증이 발생한 건 flexor digitorium profundus 근육 중 새끼손가락에 이어지는 바깥면에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고, 주먹을 꽉 쥘 때 아픈 것은 그 근방의 flexor carpi ulnaris도 다쳤기 때문인 것이다.

여기서 놓치고 갈 수 없는 정보는 바로 근육의 부착 지점이다. 시험 빈출이기 때문!


나: 그 근육들은 어디에 부착해?




G: flexor digitorium muscle은 ulna bone의 팔꿈치쪽에 붙어서 손가락 끝까지 가.




사실 부착부위는 이름에서부터 이미 알 수 있다.


이제 정말 막바지다. 제미나이와 대화를 하는데 냉찜질팩에 올려둔 왼팔이 너무 아팠다. 혹시나 뼈에 금이라도 간 것은 아닐까 싶어 이것도 물어봤다.


나: 뼈가 다쳤을 때와 근육이 다쳤을 때 증상의 차이점이 뭐야?





G: 뼈의 부상이 보통 더 붓고 고통스럽고, 만졌을 때 더 부드러워.





나의 증상으로 봤을 때 다행히도 뼈는 다치지 않은 것 같다. 바깥쪽의 flexor 근육들을 세게 다쳤을 뿐. 그리고 거울을 봤을 때 팔의 혈관 자리를 따라 피멍이 들어있었다. 어떤 혈관인지도 궁금해.


나: 그리고 ulna 뼈 위의 정맥을 따라 멍도 들었는데, 이건 어떤 혈관인지가 궁금하네.





G: 음, 그건 basilic vein일 수 있어. Ulna 뼈를 따라 이어지고 겉으로 꽤 잘 보여. 너의 손과 아래팔의 피를 심장으로 돌려주는 핵심 혈관이지.



출처: Wikipedia

Basilic vein은 손끝부터 팔을 지나 쇄골로 이어지는 정맥 중 하나이다. Superficial vein(연한 파랑)이라는 것은 겉으로 보았을 때 보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거울로 확인한 '혈관이 지나는 자리'가 맞을 것이다.


나: 알겠어. 고마워




G: 난 의사 아냐. 병원에 가.






오늘 일어나보니 다행히도 팔의 붓기가 조금 가라앉았다. 여전히 팔이 새파랗고 새끼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 아프지만, 팔의 flexor muscle들을 탐구할 기회와 좋은 글감을 얻었기에 즐거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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