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아탄, 빛 上

뱀과 매의 창세기

by 박규동

8. 레비아탄, 빛 上


파도에 젖은 사혈은 비 맞은 개처럼 바닷가에 주저앉아, 떠오르는 태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전쟁은 끝난 것인가. 내 동생은 어디로 갔으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혈은 자신이 일국의 왕자로서도, 형으로서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잠겼다. 솟아오르는 태양 아래, 그의 사색은 죄책감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명의 궁으로 복귀해 다음 계획을 세워야 했으나, 그는 지쳐버렸다. 남쪽의 돌, 지켜야 할 국가와 가족. 모든 것이 자신의 그릇을 벗어난 일처럼 느껴졌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사혈은 해안으로 다가오는 작은 배를 발견했다. 갈색 로브의 남자와 함께 다가오는 솔로몬이었다.


솔로몬의 갑옷이 햇살을 반사하며 점점 가까워졌다. 배에서 뛰어내린 두 사람은 바닷물을 걷어차며 사혈에게 다가왔다. 솔로몬이 사혈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너의 넘치는 힘으로도 이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지?”


“그래. 마음껏 모욕해라.”


“나는 이제 불타는 돌이라면 지긋지긋하다. 너는 어떤가?”


“돌을 부술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군. 마녀 아시아의 말이 옳았어. 돌을 둔 채 전쟁이나 일삼는 게 차라리 가장 문명적인 모습이었어.”


“나는 그 불타는 돌을 없애러 갈 것이다. 너의 도움이 필요해.”


“말이야 쉽지. 전쟁터에서 본 괴물도 돌을 없애지는 못할 것이야. 무릎 꿇고 마녀에게 부탁이라도 할 텐가? 확신하건대, 그녀조차 돌을 없앨 방법은 모를 거다. 게다가 균형의 수호자라는 그녀가 돌을 사라지게 둘 이유도 없겠지.”


“그래. 그렇다면 포기하지. 다시 한번 괴물 같은 놈들이 뛰쳐나와 이 땅을 파괴하겠지. 돌은 계속해서 혼란을 부를 것이고, 힘을 원하는 자들은 끊임없이 나타날 테니까. 자네 말대로 방법이 없으니, 포기하겠네.”


사혈은 말없이 해안선을 응시했다. 이삭은 팔짱을 낀 채 깊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포기를 선언한 솔로몬은 미련 없이 배로 돌아가려는 듯 발걸음을 돌렸다.


사혈은 솔로몬의 다리가 바닷물에 잠기기 직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무엇을 해주면 되겠나.”


“다음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명의 모든 백성을 대피시켜라. 네가 자랑하던 거대한 군함, 모든 배를 동원해 백성들을 설산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옮겨.”


“바닷속의 괴수는?”


“걱정하지 마라.”


“설산에는 아직 그놈이 있지 않나? 하얀 머리.”


“그래. 명의 백성을 단 한 명이라도 살리기 위해선, 네가 조슈아를 죽여야겠지.”


“내가 어떻게 그 괴물을 이길 수 있을 거라 확신하지?”


“그것 또한 걱정할 필요 없다.”


사혈은 미세한 불씨가 남은 자신의 도끼창을 내려다보았다. 이삭이 나직한 목소리로 솔로몬에게 물었다.


“정말로 저자가 조슈아를 물리칠 수 있는 건가?”


“모르지. 허나 모른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사혈이 휘파람을 불어 말을 불렀다. 그는 북쪽의 철학자, 이삭을 바라보았다.


“그래, 여기 수도사와 함께 남으로 갈 것인가? 돌을 파괴하러?”


솔로몬은 이삭에게 해변의 시체 옆에 널브러진 검과 방패를 던져주었다.


“이삭, 자네는 우르고스로 돌아가서 최대한 많은 사람을 북쪽 설산으로 대피시켜 주게.”


“그렇다면 우르고스로 돌아가려면... 바다의 중앙을 건널 수 없으니, 남쪽 땅을 거쳐 가야 하나?”


“아니, 자네 역시 바닷속 괴수는 걱정할 필요 없네.”


“혹시 나에게도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사혈은 다가온 말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의아해했다.


“나에게도?”


이삭은 솔로몬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허나 그에게 검과 방패를 쥐여준 저의를 생각해야 했다.


“시민들을 대피시키려면, 주교의 군사를 막아야겠군.”


말에 올라탄 사혈은 궁을 향해 달리기 전 솔로몬을 돌아보았다.


“그러는 동안 자네는 남쪽에 가서 돌을 파괴할 것인가?”


“그래.”


“남쪽에는 아버지가 계실 거야. 아버지를 부탁한다. 계획대로 돼야 할 거야.”



사혈은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궁을 향해 질주했다. 이삭 역시 명의 깃발이 꽂힌 배에 오를 채비를 했다. 붉은 천을 두른 명의 병사들은 은빛 매의 갑옷을 입은 솔로몬의 명령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삭은 해변에 홀로 선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사혈 장군이 기적적으로 조슈아를 이긴다고 해도, 계획대로 되겠나?”


“믿음을 가져 보게.”


솔로몬 역시 명의 병사들이 준비한 다른 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밧줄을 타고 명의 군함에 오른 솔로몬은 돛을 펴라는 명령을 내렸다.



세 남자는 같은 사명을 안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사혈은 궁을 향해 달렸다. 스쳐 가는 바람과 말의 온기를 느끼며 되뇌었다. 가족에 대한 걱정, 죄책감과 허망함을 이겨내야 한다. 국가나 정치 따위는 상관없다. 그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이삭은 뱃머리에 앉아 우르고스의 땅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믿음을 잃어 우르고스를 떠난 남자. 북쪽 설산에서의 명상도, 수많은 책도 그에게 진정한 믿음을 설명해 주지 못했다.


바닷바람에 로브를 뒤집어쓴 이삭이 믿는 단 하나는 분명했다. 그는 친구이자 동료인 솔로몬을 믿었다. 이삭은 아직 진리를 깨닫지 못했고, 훌륭한 수도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 명의 목숨이라도 살리기 위해 그는 친구를 믿기로 했다. 바다 위에서, 그는 진정한 성인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솔로몬의 배는 불타는 남쪽 땅에 가까워졌다. 그는 바다에 폭풍이 없음에 안도했다. 그렇다면 이삭의 배 역시 무사히 우르고스로 향하고 있을 터였다.


명의 병사가 솔로몬 곁으로 다가왔다.


“정박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십시오. 당신들의 왕을 살려 봅시다.”


솔로몬과 명의 병사들은 남쪽 땅의 뜨거운 해변에 발을 내디뎠다. 눈앞에는 불타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숲속의 야만인들이 공격해 올지, 솔로몬은 확신할 수 없었다. 마녀가 이야기를 들어 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기에 솔로몬은 마녀에게 받은 창을 꺼내 들고 숲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불타는 나무들과 재를 밟으며 진군하는 일행은 땀을 흘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솔로몬은 분명 숲속에서 야만인들의 기척을 느꼈다.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마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일단 내 이야기를 들어보자는 거겠지. 분명 명의 왕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일행은 암석으로 이루어진 고지에서 야만인들의 천막이 있는 평지로 내려갔다. 멀리 불타는 돌이 보였다. 마녀 아시아가 있는 천막 주변에는 명왕의 친위대가 도열해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돌은 하늘의 별처럼 빛났다.


평지에 내려선 솔로몬과 병사들은 천막에서 나오는 야만인들을 향해 검을 뽑았다. 허나 야만인들은 공격할 의지가 없어 보였다.


솔로몬은 마녀 아시아가 있는 거대한 천막으로 향했다. 병사들에게 입구를 지켜달라 당부한 뒤,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구석, 허름한 의자에는 붉은 머리의 사내, 명왕이 앉아 있었다. 구릿빛 피부의 마녀 아시아가 뒤를 돌아 솔로몬을 바라보았다.


“솔로몬, 네가 뱉은 말 중 지킨 것이 하나도 없구나.”


“지켜내는 과정이다.”


솔로몬은 아시아를 지나쳐, 명왕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돌아가십시오. 돌은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사혈 왕자의 말을 따르십시오.”


그는 표정 없이 솔로몬을 응시했다. 그는 소매에서 작은 돌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돌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명왕은 이미 그 불꽃을 제어하는 법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아시아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결정이 났군. 처음 약조한 대로, 돌을 다루는 능력이 있는 명에게 돌을 넘기겠다.”


“아시아. 나는 너의 사명을 이룰 수 있다.”


“나의 사명?”


“세상의 균형을 지키는 것. 그것이 너의 사명이라 하지 않았나?”


“그래. 그것이 돌이 내게 보여준 운명이지. 그 운명대로 명의 왕에게 돌을 건네는 것이다.”


“돌을 없앨 방법이 있다.”


“미안하지만 네게 기회를 더 줄 수는 없어. 돌을 이용한 괴물들이 태어났다. 정확히 내가 우려하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어.”



그때 천막 안으로 작고 붉은 뱀 한 마리가 스르르 기어들어 왔다. 솔로몬은 개의치 않았으나, 명왕과 아시아는 뱀을 노려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동시에 천막 밖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현악기의 선율 같은 목소리. 허나 천막 안의 모두는 그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세 사람이 천막 밖으로 나섰을 때, 그들을 맞이한 건 토막 난 채 널브러진 명국 병사들의 시신이었다.


시신을 밟으며 모습을 드러낸 사손은, 돌을 한 번 응시한 뒤 아버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제가 신을 담는 그릇이 되겠습니다. 불타는 뱀이든, 운석이든, 이름 따위는 상관없습니다. 돌아가십시오.”


사손은 피 묻은 장검을 든 채 명왕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명왕은 아들의 눈을 바라보았다. 살아있는 것의 눈빛이라 부를 수 없는, 공허하고 기이한 황색의 눈이었다.


“솔로몬이 돌을 없애려 한 이유를 알겠군. 마녀에게도 골칫덩이겠어.”


사손이 명왕의 코앞까지 다가와 장검을 움켜쥐었다.


순간 불타는 창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솔로몬은 창을 겨눈 채 아시아를 돌아보았다.


“내가 돌을 없앨 수 있다. 운명이든, 하늘의 별이든 상관하지 않겠다. 이번만큼은 나를 믿어줘. 부탁이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사손의 창백한 주먹이 솔로몬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다. 솔로몬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로 나뒹굴었다. 창을 놓친 솔로몬이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서자, 사손은 검을 치켜들었다.


아시아는 직감했다. 붉은 비단을 걸친, 뱀이 되어버린 사내. 이런 괴물이 있는 명국에 돌을 넘길 수는 없었다.


아시아는 솔로몬이 놓친 창을 집어 들어 땅을 강하게 내리쳤다.


진동을 느낀 야만인들이 천막과 굴에서 쏟아져 나와 사손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손은 등을 돌려 자신에게 달려드는 야만인들을 바라보았다.


사손이 검을 휘두르자, 야만인들은 거목이 쓰러지듯 칼이 움직이는 방향대로 잘려 나갔다.


아시아는 다시 한번 창을 내리쳤다. 구덩이에서 기어 나온 야만인들이 멈추지 않고 사손을 향해 달렸다. 아시아는 침묵하는 명왕을 바라보았다.


“돌이 당신 아들에게 잘 맞나 보군. 당신 핏줄이 이곳에 온 게 처음이 아니지? 당신의 선조, 그 피에 돌의 힘이 섞여 있어. 미쳐 날뛰는 당신 아들을 봐라. 당신 가문에는 돌을 줄 수 없다.”


명왕은 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선조들은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니라, 얻지 않은 것이다.


사손이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솔로몬의 눈에 야만인들의 처참한 미래가 스쳤다. 허리가 잘려 나가는 야만인들의 모습.


그때, 사손의 검기를 막아선 자가 있었다. 명왕이었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조잡한 곡도를 주워 들어 아들의 공격을 받아냈다.


사손의 눈에 어린 시절 두려워했던 엄한 부친의 모습이 스쳤다. 공포는 순식간에 분노로 바뀌어, 그는 검을 든 채 아버지를 향해 돌진했다.


솔로몬은 사혈의 말을 떠올렸다.


아버지를 지켜주게.


솔로몬은 매의 방패에 수납된 검을 뽑아 사손을 향해 뛰어들었다. 솔로몬의 검이 명왕을 노리는 사손의 장검을 쳐냈다.


솔로몬을 향해 검을 무자비하게 내리치는 사손의 창백한 팔은, 미쳐 날뛰는 뱀 한 마리와 같았다. 방패와 검으로 간신히 막아내던 솔로몬 앞을 붉은 비단을 입은 왕이 가로막았다.


“아시아에게 가라.”


아시아는 다시 한번 창을 바닥에 내리쳐 야만인들을 진군시켰다. 살아남은 명의 병사들도 왕을 지키기 위해 사손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아시아가 솔로몬에게 물었다.


“계획을 말해봐라. 어떻게 돌을 부순다는 것이지?”


“저 거대한 돌을 바다에 던질 수는 없는 법. 그러니 바다가 이곳에 오게 할 것이다.”


“누구도 레비아탄을 이용할 수는 없어. 네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너희가 믿는 황제는 레비아탄의 영혼을 담은 그릇일 뿐이야. 오직 황제만이 레비아탄을 움직일 수 있어.”


아시아는 솔로몬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푸른 파도를 보았다.


“매의 주교와 무슨 작당을 한 것이냐, 솔로몬.”


아시아는 땀을 흘리며 불타는 창으로 돌을 내리쳤다. 떨어져 나온 파편이 그녀의 손안에서 반지로 변했다. 그녀는 솔로몬에게 반지를 건넸다.


“레비아탄을 움직이기 위해, 은빛 매를 격추할 셈인가? 주교는 창조주가 빚어낸 초월의 짐승이다. 하늘을 봐라.”


아시아는 밤하늘에 희미하게 빛나는 별 하나를 가리켰다.


“흙으로 빚어진 저 별이 가장 강하게 빛날 때, 사신이 돕는다면 그 매를 떨어트릴 수 있을 것이다. 우르고스까지 가는데 시간이 걸릴 텐데?”


“파도가 나를 도울 것이다. 그때까지 견뎌줄 수 있겠나?”


“저 뱀을 상대로...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닌 시간을 끄는 거라면 가능하지.”


야만인들을 학살하며 아버지와 검을 맞대는 사손. 그 전장을 뚫고 불타는 말이 아시아와 솔로몬 앞에 멈춰 섰다.


솔로몬은 말에 올라타 미친 듯이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전례 없는 말의 속도에 솔로몬은 균형을 잡는 데 애를 먹었다. 허나 바람에 섞인 불의 열기를 느끼지 않아도 됨에 감사했다.


해변에 도착한 솔로몬은 아시아가 쓰던, 불이 붙은 배를 발견했다.


이곳에는 불붙지 않은 게 없는 것인가.


솔로몬이 올라탄 배는 화염으로 바다를 밀어냈다. 솔로몬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눈에 다시 한번 파도가 일렁였다. 거대한 촉수를 바다의 북쪽으로 밀어내는 괴수의 형상을 그렸다.


거대한 파도가 북쪽으로 향하는 솔로몬의 배를 덮쳐왔다. 솔로몬은 파도의 속도에 몸을 실었다.


파도는 우르고스의 시내까지 차고 들어와 시장을 휩쓸었다. 그가 과일과 식료품을 사던 거리 위를 배로 가로지르는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물살은 다시 해변으로 빠져나갔다.


솔로몬은 배에서 내려, 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두세 계단씩 건너뛰며, 주교와 황제가 있는 탑의 정상을 향해 질주했다.


그는 탑의 병사와 사제들을 밀치고 정상 아래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며 주교 경비단의 지시에 따랐다. 갑옷을 벗고, 방패와 창, 검을 건넸다. 솔로몬의 급한 마음을 모르는 경비병들은 여유를 부렸다.


“여기에 서명해주시면 됩니다. 주교님 면담 끝나고 가져가시면 됩니다.”


가벼운 차림이 된 솔로몬은 옥상으로 향하는 거대한 문을 열었다.


어느새 밝아진 달빛 아래, 숨을 헐떡이는 솔로몬에게 주교가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솔로몬. 약속을 이행하러 왔군. 레비아탄의 영혼을 담을 새로운 그릇이 될 준비가 되었나? 고결한 희생이다.”


“이제 나를 황제라 불러야겠군.”


솔로몬은 주교 앞에서 하얀 로브를 걸친 뒤, 새로 만들어진 옥좌에 앉았다.


주교는 말라비틀어진 황제의 심장을 단검으로 찔러, 솔로몬의 발치에 던졌다. 황제의 비명과 함께 바다가 요동쳤다.


주교는 유골함을 들고 솔로몬에게 다가왔다.


“걱정하지 말게, 레비아탄의 영혼이 자네에게 담기면 바다는 다시 잠잠해질 거야.”


“영혼을 들이키기 전, 몇 가지를 물어봐도 괜찮겠나?”


“그래. 황제여.”


“짐승을 길들이라는 창조주의 유언을 받은 당신 또한 짐승 아닌가?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더군. 그가 죽는 순간, 수탉의 머리에 인간의 몸, 뱀의 다리를 한 괴물을 보았다고.”


“질문이 무엇인지 모르겠군. 들이마셔라.”


주교는 단검으로 자신의 손을 베어, 흐르는 피를 유골함에 담아 건넸다.


솔로몬은 영혼의 돌 가루를 들이켜며 옥좌 위에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가 비명을 지르자 바다의 폭풍은 더욱 거세졌다. 전대 황제가 그랬듯, 솔로몬은 옥좌에 묶여 영생이라는 감옥에 갇힐 차례였다.


눈앞에 거친 파도가 어른거렸고, 몸에서 돋아난 레비아탄의 촉수 같은 것들이 옥좌를 휘감아 그를 결박했다. 주교는 괴물로 변해가는 솔로몬을 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결국은 평화가 찾아왔군. 네가 할 일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뿐이다. 앞으로 평생.”


그때, 아시아가 건넨 반지가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당황한 주교가 반지를 빼내려 했으나, 뜨거운 화염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솔로몬 역시 고통스러워했다. 이내 솔로몬에게서 자라난 촉수와 하얀 로브가 불에 타 재가 되어 떨어져 나갔다.


솔로몬은 옥좌에서 일어나 불타는 몸으로 주교에게 다가갔다. 솔로몬의 육체가 불탈수록 바다의 폭풍은 맹렬해졌다. 주교는 뒷걸음질 쳤다.


“아시아 이 짐승년이 배신한 것인가... 균형과 평화라는 사명은.... 솔로몬, 자리에 앉아라. 창조주가 슬퍼하신다. 자리에 앉아 남은 레비아탄의 영혼을 받아들여! 반쪽짜리 영혼은 창조주의 뜻이 아니야. 혼란이 올 거야.”


“하나의 육신에 어찌 두 영혼이 깃들겠나, 아브라삭스. 나는 평생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 채 살아왔다. 허나 구원의 돌, 불타는 돌을 보니 내가 누군지 알겠더군. 마치 거울처럼 나를 비추었다. 나 솔로몬은 베헤모스. 악신의 놀이터인 이 푸른 땅을 파괴할 존재다.”


푸른 땅의 중앙, 바다가 갈라지며 거대한 해일이 우르고스를 덮치기 시작했다. 레비아탄이 자유를 얻었다.


솔로몬은 불타는 손으로 주교의 목을 틀어쥐었다. 주교는 단검으로 솔로몬의 배를 찔렀으나, 칼로 불을 베려는 듯 소용없었다.


목을 조여오는 악력과 화염에 신음하던 주교는, 우르고스를 집어삼키는 해일을 내려다보았다. 불타는 육체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주교는 탑 아래로 몸을 던졌다. 허나 솔로몬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주교의 목을 놓지 않았다.


해일과 충돌하는 순간, 주교의 머리는 수탉으로, 다리는 뱀으로 변하더니 이내 바닷물 속 재가 되어 흩어졌다.


솔로몬은 하얀 빛을 내뿜으며 승천했다. 그 형상은 마치 하얀 말과 같았다.


밤하늘에 선 백마. 진정한 본모습을 찾은 그 역시 푸른 땅을 떠나야 할 차례였다.


하늘로 오르던 솔로몬은 마지막으로 해야 할 두 가지 일을 떠올렸다. 남겨질 푸른 땅에 생명을 불어넣을 두 남자를 구원하는 것.


솔로몬은 마지막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다시 한번 우르고스의 북쪽 해변을 향해 유성처럼 추락했다. 그의 믿음은 해일에 갇히는 우르고스의 무고한 생명들을 향해 빛났다.



명의 모든 백성은 군함과 상선, 작은 쪽배에까지 몸을 싣고 북쪽으로 향했다.


선두에 선 군함의 뱃머리에는 사혈이 서 있었다. 그는 피난길에 오른 수많은 배를 돌아보았다. 그제야 솔로몬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믿음을 걸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명의 사자, 무인, 초인이라 불리는 사혈. 허나 바닷바람에 식은땀을 식히는 그는 고뇌하는 한 명의 남자일 뿐이었다. 머릿속은 온통 동생과 아버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북쪽 섬에 가까워지자 한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사혈은 붉은 장발을 묶으며 설산을 노려보았다.


조슈아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도, 전략도, 없었다. 그저 그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 하나 뿐이었다.


사혈은 뱃머리에서 북쪽의 차가운 땅으로 뛰어내렸다. 육중한 갑옷과 도끼창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그는 병사들에게 신호를 보낸 뒤 홀로 설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을 찾는 재주는 없었으나, 눈보라를 뚫고 묵묵히 고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거센 추위와 바람에 창끝의 불꽃은 희미해져 갔다.


산 중턱에 오른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남쪽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명나라의 피난 행렬은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설산의 추위와 조슈아에게 패배한다면, 저 수많은 생명은 파리 목숨이 될 터였다. 그는 이를 뼈저리게 되새겼다. 창에서 다시금 불길이 피어올랐다.


설산 정상 즈음에 다다르자 거대한 수도원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녹슨 철문 앞에 선 그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사내를 볼 수 있었다. 사혈은 철문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하얀 머리!”


“내가 열어줄 테니 기다려라, 멍청한 놈.”


눈보라를 헤치고 나타난 조슈아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손에게 물어뜯긴 어깨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갑옷에는 핏자국이 선명했다.


길게 자란 손톱으로 흰 머리를 넘기며, 조슈아는 한쪽 팔로 거대한 철문을 밀었다. 철문이 쇠 긁는 소리를 토하며 열렸다. 조슈아는 붉은 머리의 사내를 맞이했다.


“예배당 안에 불을 피워 놓았으니 몸이나 녹여라. 준비되면 그때 죽여주마.”


조슈아가 등을 돌리려는 찰나, 사혈은 도끼창을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조슈아는 한 손에 든 검으로 사혈의 창을 막아냈다.


“산을 오르느라 힘들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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