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下

뱀과 매의 창세기

by 박규동

7. 전쟁 下


조슈아는 명의 왕자들을 뒤로하고 솔로몬을 응시했다. 마치 악령이라도 마주한 표정이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다리 위의 병사들은 눈치를 살피며 각자의 진지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황제의 명이라니. 믿음을 잃더니 이젠 그분의 이름마저 사칭하십니까.”


믿지 못하는 조슈아에게 솔로몬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던졌다.


전쟁을 멈추고 즉각 복귀하라는 황제의 친필과 옥새. 조슈아는 옥새를 확인하는 순간 허망함에 무너져 내렸다.


솔로몬은 넋이 나간 조슈아를 내버려 둔 채, 말에 올라 이삭이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의식을 되찾은 이삭은 곁에 솔로몬이 앉아 있음을 느꼈다.


“황제를 설득했나?”


“아니. 황제는 우리가 아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역시. 누구도 황제를 본 적이 없다더니.”


“돌을 통해 영생을 얻은 태초의 석공, 그자가 주교였어. 황제도, 은빛 매도 모두 주교가 지어낸 허상일 뿐이야.”


“주교의 거짓을 파헤쳤다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거지?”


“거래를 했다.”


“남쪽으로 가야 하네. 자네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



천막 안의 두 남자는 일단 전쟁이 멈췄음에 안도했다. 허나 이삭은 솔로몬이 주교와 맺었다는 거래에 불안감을 느꼈다. 천막 밖에서 거대한 짐승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다리 위에 홀로 남은 조슈아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 그는 우르고스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조슈아는 더 이상 자신이 누구였는지조차 기억할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 군사 훈련, 솔로몬을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모든 것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주교가 건넨 가루를 들이마신 후, 머릿속에는 수만 명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 목소리들은 더 강한 힘을, 초월적인 검술과 전술을 속삭여주었다. 쉴 새 없이 끓어오르는 영혼들의 분노와 폭력, 몸에서 풍기는 죽음의 향.


조슈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사명이 있으니까. 대륙을 통일해 황제의 뜻을 전해야 하는 숭고한 사명이 있으니, 이 정도 희생은 감내할 수 있었다. 누가 세상을 창조했는지, 영혼의 자유가 누구의 덕인지. 모든 인간의 눈을 뜨게 해 줄 테니.


통일이 코앞이었다. 모두가 불가능하다던 승리와 영광이 손에 잡힐 듯했다. 자신이 그 전쟁의 주역이 되어 불멸의 이름으로 남으리라 진심으로 믿었다.


조슈아는 황제의 서신을 바닥에 내던졌다.


‘황제가 나를 버렸을 리 없다. 솔로몬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황제가 내 믿음을 시험하는 것이다. 폐하께서는 분명히…. 내가 이교도들의 영혼을 인도하길 바라실 거야. 이건 황제의 시험이다….’


조슈아는 사손의 부축을 받으며 다리 위를 벗어나는 사혈의 등을 응시했다.


조슈아는 다시 한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사혈의 등을 노리고 힘껏 검을 투척했다. 빛나는 검은 매처럼 허공을 갈랐다.


사혈을 부축하던 사손이 형을 거칠게 밀어냈다.


그 순간, 조슈아의 검이 사손의 가슴을 관통했다.


사혈은 눈앞의 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찰나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사혈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동생을 보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사고가 정지해 버렸다.


다리 위, 검에 꽂힌 채 쓰러진 사손이 창백한 손가락을 들어 말 안장의 상자를 가리켰다.


사혈은 짐승처럼 달려가 상자를 열었다. 솔로몬에게 환영을 보여주었던 그 돌이었다. 사혈은 떨리는 손으로 동생의 손에 돌을 쥐여 주었다.


눈이 감기며 피를 토하던 사손은, 손에 쥔 돌을 입가로 가져갔다.


사손은 입가에 가져간 돌을 이로 부수어 삼켰다. 이와 함께 부서진 돌 조각을 삼켜낸 사손은 이내 눈을 감았다.


사혈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하얀 머리에 찢어진 입으로 웃고 있는 조슈아가 보였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가? 너는 네가 믿는 신의 말도 듣지 않는 놈이구나. 네 신보다 더 악한 피조물이니, 네놈은 살 가치가 없는 짐승이다.”


“그래. 너까지 죽이고 나서, 명령을 따르고 평화를 찾겠다.”


사혈은 넝마가 된 갑옷을 벗어 던졌다. 피땀에 젖은 붉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도끼창을 움켜쥐었다. 사혈은 표정 없는 얼굴로 조슈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순간, 등 뒤에서 짐승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운 비명에 전장의 모두가 귀를 틀어막았다.


사혈은 소리가 들리는 뒤쪽을 돌아보았다. 짐승의 괴성을 지르며 사손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사손은 자신의 가슴을 관통한 검을 뽑아내며 다시 한번 포효했다. 뱀의 눈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 길게 돋아난 손톱. 조슈아와는 다른 모습의 괴물이 되었다.


사혈은 다시 동생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발걸음이었다.


사손은 가슴에서 뽑아낸 검을 조슈아를 향해 던졌다. 사혈의 창이 그랬듯, 피 묻은 검 또한 벼락처럼 조슈아의 발치에 꽂혔다.


자리에서 일어나 굽은 허리에 눈을 치켜뜬 사손. 사혈은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동생의 팔과 다리는 마치 뱀비늘처럼 변해가고 있었다. 사혈이 조심스레 동생의 차가운 팔을 잡았다.


순간 뱀의 눈이 매섭게 사혈을 쏘아보았다.


사손은 사혈을 거칠게 잡아 채 다리 밑 바다로 던져버렸다.


사손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장검을 집어 들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조슈아는, 마치 원하던 대로 흘러간다는 듯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머릿속에 목소리가 들리지?”


사손은 빠르게 조슈아를 향해 낮게 달렸다. 붉은 비단 자락이 펄럭이는 모습은 흡사 조슈아를 향해 쏟아지는 불화살 같았다.


사손이 조슈아의 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매섭게 노려보는 노란 뱀의 동공 앞에서도 조슈아는 물러서지 않았다. 조슈아는 자신의 목을 조르는 팔을 쳐내며, 무릎으로 사손의 명치를 가격했다.


한발 물러선 사손은 다시 한번 조슈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머릿속의 목소리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머릿속 목소리가 우주를 만들어낸다는 돌의 지혜. 허나 붉은 비단의 뱀은 지혜를 담기엔 이미 통제 불능의 괴물이 되어버렸다.


사손이 조슈아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늑대의 이빨처럼 날카로운 이에 뜯겨 나간 살점과 함께, 붉은 선혈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조슈아는 한 손으로 출혈을 막으며 눈앞에 쌓인, 미처 사용하지 못한 포탄들을 바라보았다. 조슈아는 포탄을 향해 검의 은빛 기운을 집중시켰다.


이성이 사라진 사손은 그러한 조슈아를 뒤로한 채 자신의 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사손은 날카로운 손톱으로 장검을 치켜들며 괴성을 질렀다. 검을 쥔 손이 타들어 가는 듯한 비명과 함께, 검신은 붉은 기운을 띠었다.


사손은 그대로 조슈아를 향해 돌격했다.


조슈아는 유성처럼 낙하하는 사손을 향해, 포탄을 던진 후, 공중의 포탄을 베어냈다.


대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화염 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늘은 마치 피를 흘리는 석양처럼 붉게 물들었다. 폭풍 같은 화염과 거대한 굉음이 대지를 집어삼켰다. 그 충격에 다리는 붕괴했고, 양측 진지의 천막들은 찢겨 나갔다.



거대한 폭발과 소음이 휩쓸고 간 뒤. 이명과 자욱한 연기 속에서 솔로몬은 목격했다.


은빛의 새는 설산 위로 떨어지고, 붉은빛의 뱀은 남쪽 야만의 땅으로 떨어지는 광경.


솔로몬은 주교와 맺은 거래를 떠올렸다. 그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다. 그와 이삭은 폭발의 연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바다를 향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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