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아탄, 빛. 完

뱀과 매의 창세기

by 박규동

레비아탄, 빛


사혈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창을 휘둘렀다. 또다시 같은 손, 같은 검으로 창을 막아내는 조슈아.


사혈은 그제야 조슈아가 한쪽 팔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괴물이 된 동생이 조슈아의 어깨를 물어 뜯던 광경이 스쳤다. 사혈은 전투의 순간에도 동생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혈은 조슈아의 가슴을 걷어차 거리를 벌렸다. 회전력을 이용해 다시금 창을 휘둘렀다. 거대한 불길을 머금고 낙하하는 창을, 조슈아는 검으로 받아쳤다.


큰 공격 이후 사혈이 빈틈을 보이자, 조슈아는 검을 가볍게 뻗었다.


조슈아는 확신했다. 황제의 힘을 받은 자신이 저런 야만적인 이교도에게 패배할 리 없다고.


사혈의 허리로 향하던 검은 매의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사혈은 헛웃음을 흘리며 투구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자신의 창을 수도원 안뜰 눈밭에 내리꽂았다.


“영혼이니, 마법의 돌이니, 무엇이든 강하게 내리치면 부서지기 마련이다. 그게 내가 살면서 얻은 교훈이다. 검도 없는 네놈은 내 창에 죽을 자격조차 없다. 맨손으로 으깨주마.”


“그런 오만함이 다시 한번 너를 패배자로 만들 것이다. 경솔하고 지능 낮은 이교도 놈.”


사혈과 조슈아는 동시에 갑옷을 벗고 각반을 풀어헤쳤다. 두 사내는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 주먹을 교환했다.


조슈아는 한 팔만으로 사혈의 공격을 쳐내며 맹렬히 주먹을 뻗었다. 쏟아지는 주먹을 피하던 사혈은 조슈아의 주먹을 한 손으로 낚아챘다.


사혈의 뇌리에 조슈아의 무릎에 명치를 맞던 순간이 스쳤다. 그는 한 박자 빠르게 조슈아의 명치를 무릎으로 가격했다.


충격에 조슈아가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붉은 피를 토했다.


사혈은 재빨리 조슈아의 등 뒤로 돌아가 허리를 싸잡았다. 그를 뽑아 올린 사혈은 수도원 안뜰의 비석 위로 내동댕이쳤다.


척추가 비석에 부딪히는 파열음과 함께 조슈아가 쓰러졌다. 사혈은 등을 돌려, 끝을 내기 위해 꽂아둔 창을 향해 걸어갔다.


“솔로몬에게 배운 것도 없나?”


“한 가지 있다.”


조슈아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사혈의 목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순간, 붉은 나무로 깎은 화살비가 조슈아에게 쏟아졌다.


화살이 온몸에 박힌 조슈아가 바닥으로 무너졌다. 사혈은 주저앉아 조슈아의 몸에 박힌 화살들을 내려다보았다. 조슈아는 사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배당에 들어가 몸을 녹여라. 따뜻할 게다.”


그는 눈을 감은 조슈아를 보며 생각했다.


솔로몬의 말이 맞았군. 그 자식은 내가 이길 것이라는 미래를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지.


사혈은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설산에 은거하던 명의 패잔병들이 활을 든 채 예배당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사혈은 그들에게 이곳으로 올라올 명나라 백성들의 안내를 부탁한 후 예배당에 들어섰다. 조슈아의 유언대로, 사혈은 벽난로 앞에 앉아 언 몸을 녹였다. 금발의 조슈아가 앉았던 자리에서, 전쟁과 희생, 피 묻은 승리 끝에 무엇이 남았는지 자문했다. 명예로운 전투 뒤에 기대했던 진리가 찾아오지 않았다.


타오르는 불길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에 답이 담기지 않았다.




솔로몬이 아직 남쪽 땅에서 출발하기 전, 탑 위로 떠오른 반달이 구름 뒤로 숨기를 반복했다.


갈색 로브를 뒤집어쓴 이삭은 우르고스의 경계가 삼엄해졌음을 피부로 느꼈다. 이삭은 순찰하는 경비병들의 군화 소리를 피해 시장으로 들어섰다.


정규군 대부분이 북쪽 진지에 머무르는 상황. 저들은 주교의 사병임이 분명했다.


이삭은 달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를 밟으며 시장 안, 석공들의 건물로 들어섰다.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문을 닫고, 노인들이 기다리는 지하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자 근심 어린 노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오랫동안 비밀을 지켜온 이들이 작금의 사태에 무심할 리 없었다. 노인이 급하게 이삭을 자리에 앉히며 물었다.


“솔로몬은? 그는 괜찮은가?”


“보름달이 뜨기 전에 돌을 제거하기로 했습니다.”


“엄청난 양의 성수라도 돌의 불꽃을 잠재우진 못할 걸세. 솔로몬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의 부탁이 있습니다. 보름달이 뜨기 전, 최대한 많은 사람을 북쪽 땅으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도시의 경비가 삼엄해졌어. 쉽지 않을 거야.”


이삭은 탁자 위 종이에 황제의 옥새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르고스의 시민, 하물며 주교의 사병들조차 황제 옥새의 형상을 정확히 아는 이는 없었다. 붉은 사각형 안, 숫자 ‘6’과 비슷하다는 소문만이 무성했다.


이삭은 종이 위에 옥새를 닮은 숫자 ‘6’을 반복해서 써 내려갔다. 이내 이삭의 의도를 간파한 노인들은 반듯하게 표식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이삭은 붓을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군인, 주교와 관련 없는 사람, 사제가 아닌 사람들. 믿을 수 있는 모두에게 이 표식을 나눠주십시오. 필요할 것입니다.”


아침 해가 뜬 후, 석공의 건물을 나서는 이삭에게 노인이 다가왔다.


“명의 사람들이 북으로 대피하고 있다네.”


“사혈 장군이 승리한 것입니까?”


“그런 것까진 알 수 없네. 그저 명의 백성 대부분이 북쪽 땅으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만 들었을 뿐이야.”


“출처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비브라는 석공일세. 그처럼 명석한 자가 우르고스를 등지고 명으로 향했을 때, 내심 실망했었지. 지금 명의 건축과 기술은 모두 그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비밀결사 노인들은 명에도 있었군요. 어찌 되었든 서둘러야 합니다. 절대 군인이나 사제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됩니다. 밤새 만든 표식을 나눠줘야 합니다.”


이삭과 노인들은 종일 바삐 움직이며 표식을 나눠주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 거절하는 사람들, 모두를 설득하기에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석공과 이삭은 그들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황제의 표식이다. 보름달이 뜨는 밤, 북쪽 해변에 가져가면 금은보화를 얻는다고 하더군.’


‘역병이 돈다는 소문이 있어. 황제가 선택한 사람들만이 살 수 있다네. 자네가 선택받은 거야. 절대 발설해서는 안 되네.’


‘황제가 말하길 이 표식이 금과 은을 대체할 거라네. 이걸 들고 북쪽 바다로 몰래 가보게. 금방 부자가 될 거야.’



보름달이 떠오른 밤. 북쪽 해변에는 수많은 배가 정박해 있었다.


횃불을 든 시민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이삭과 석공들은 표식을 확인하고 상황을 설명하기 바빴다. 언제나 귀가 밝았던 이삭은 눈을 감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쇳덩이가 부딪치는 소음, 달려오는 군화 발소리, 창과 검의 마찰음.


이삭은 서둘러 사람들을 배에 태웠다. 표식을 받은 이들을 태운 배가 막 출발할 즈음, 해변에 주교의 사병들이 들이닥쳤다.


경비단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무리에서 나와 투구를 벗었다. 그는 이삭에게 표식을 던지며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텐가?”


“주교는 이미 알고 있었나.”


“왜 그분이 우매한 백성들과 떨어져 높은 탑에 기거한다고 생각하나? 그곳에선 모든 게 보이거든. 솔로몬이 돌아왔어. 저승에서 기어 나온 자가 탑으로 달려 들더니, 주교님과 언쟁을 벌이더군. 내가 한 일은 간단했네. 개미 같은 너희들을 내려다보는 것이었지.”


단장은 웃음을 흘렸다.


“이제 내 임무는 더욱 간단해졌네. 저들이 배를 돌리지 않는다면, 네놈을 이 해변에 목만 내놓은 채 묻어버릴 것이다.”


“솔로몬이 돌아왔다고?”


“그래. 보직 해임된 사령관 따위엔 관심 없다. 저들에게 배를 돌리라고 전해라.”


이삭은 고민에 빠졌다.


솔로몬, 너의 생각이 무엇이든 어서 움직여라.


“내 목은 기꺼이 내놓지. 허나 저들은 보내줘라.”


“저들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이지?”


“나도 잘 모른다.”


“잘 모르는 것에 목을 걸겠다는 건가?”


“그래. 문제 있나?”


사병들의 단장은 해변에서 멀어지는 배들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한숨을 내쉰 단장이 입을 열었다.


“네 목은 당연히 벨 것이다. 하지만 이교도의 말을 따를 순 없지. 활을 쏘아 올려 최대한 많은 배신자를 처단할 것이다.”


주교를 경비하는 사병들의 눈빛은 조슈아의 광기와 닮아 있었다. 그들은 검을 내려놓고 하늘을 향해 장궁을 겨눴다.


활 시위를 당기려는 찰나, 이삭은 솔로몬이 건넨 낡은 검을 단장의 복부에 꽂아 넣었다.


이내 사병들은 활을 버리고 검을 뽑아 든 채 이삭을 포위했다.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삭은 뒤를 돌아 달빛을 머금은 바다를 응시했다.


파도가 강하게 몰아쳐 배들을 빠르게 북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이삭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병들을 향해, 낡은 검을 든 채 뒷걸음질쳤다. 발이 차가운 물속에 잠겼다.


솔로몬이 일개 철학자의 목숨까지 살릴 수는 없었나 보군.


다시 한번 대지가 요동치며 천둥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섬들의 중앙, 바다가 쩍 갈라지는 듯 거대한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이삭은 미소를 띠었다.


바다가 갈라지고 파도가 쏟아지니, 희생될 것은 물고기 떼와 이곳의 가련한 영혼 몇 뿐이로구나.


사병들은 이삭의 머리 위로 덮쳐오는 거대한 해일을 보고 숲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나 해일은 이삭을 포함해 대지 위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우르고스를 덮쳤다.


숲의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갔다. 해일은 우르고스의 건물들을 휩쓸며 탑에 도달했다. 이내 거대한 해일이 분노한 짐승처럼 탑을 들이받았고, 우르고스의 상징인 황제의 탑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붕괴하는 탑의 정상에서 추락한 두 불꽃. 후세에 그들 중 하나는 ‘추락한 별’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그 아수라장 속, 분명 하늘로 솟구치는 하얀 별 하나가 있었다.




이삭은 파도가 휩쓸고 간 해변에 누워 눈을 떴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바닷가. 이삭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다는 잠잠했고, 그가 떠나온 설산 또한 여전했다.


그러나 뒤를 돌아 우르고스 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곳에 있어야 할 황제의 탑은 흔적도 없었다.


이삭은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졌음을 느꼈다. 자신의 손과 발을 내려다보았다. 눈에 보이는 육신이 현실의 것이 아닌지 겁이 났다.


그는 천천히 해변을 걷기 시작했다.


“믿음 없이 살아오니, 죽어서도 갈 곳이 없구나.”


이삭은 기이하게 밝아지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를 향해 하얀 별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이삭은 그것이 임사 체험자들이 말하는 '빛'인가 싶었다.


그러나 빛이 가까워지자 형체가 드러났다. 그것은 백색의 광휘를 두른 흰 말 한 마리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말이 이삭 앞에 멈춰 섰다.


이삭은 솔로몬을 떠올렸다. 어쩌면 그가 그렇게 믿고 싶었기 때문인지, 이삭은 그 백마가 솔로몬이라 확신했다.


이삭은 빛나는 백마에 올라타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삭은 죽음 이후의 삶이 늘 궁금했다.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그는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꽤 높이 올라 이삭이 겁에 질렸을 즈음, 신성한 말은 경로를 틀어 북쪽 땅으로 급강하했다. 북쪽 해안가로 빠르게 날아가던 백마는 공중에서 이삭을 해변 아래로 떨어뜨렸다.




하늘에서 설산의 해변으로 추락하는 공포에 이삭은 눈을 번쩍 떴다.


이삭은 바닷물을 토해내며 눈부신 태양을 마주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니, 혼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의 우르고스 시민들과 명의 백성들이 보였다.


명의 석공, 하비브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의 사명은 세상을 다시금 건설하는 것일세.”




남쪽 야만의 땅. 거대한 불타는 돌을 등지고 명왕과 아시아가 서 있었다.


대지는 야만인들과 명국 병사들의 시신으로 뒤덮여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사손은 시신들을 밟으며, 뱀처럼 유연하게 아버지와 마녀를 향해 다가왔다. 아시아의 창에 남은 불씨로는 더 이상 야만인들을 빚어내기 역부족이었다. 명왕의 손에는 전장에서 주운 낡은 곡도 한 자루뿐이었다.


뱀 비늘로 뒤덮이는 적발의 사손은 굽은 등에 눈을 치켜뜬 채, 아버지를 향해 속도를 높였다.


화살처럼 쏟아지는 사손의 검이 명왕의 낡은 곡도에 막히며 불꽃을 튀겼다.


사손은 아버지를 향해 채찍질하듯 검을 휘둘렀다. 짐승처럼 도약하여 시체들을 뛰어넘으며 맹공을 퍼부었다.


이내 사손은 야만인들을 반으로 갈랐던 발도술을 펼치기 위해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순간 아시아의 불타는 창이 날아와 검을 쥔 사손의 오른손을 절단했다.


사손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 그의 주인 잃은 손목을 바라보았다. 이내 왼손으로 불타는 창을 집어 아시아를 향해 던졌다. 화염 창은 어둠 속에 수평선을 그리며 날아가, 아시아의 심장을 정확히 관통했다.


아시아는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불타는 돌에 창과 함께 박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야가 흐려졌다. 명왕의 등과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괴물의 형상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죽지 않는 존재인 줄 알았건만, 창조주의 사명을 어긴 대가가 이토록 허무하구나. 고작 인간 하나와 다름없이 쓰러지는 것을.


명왕은 아시아의 가슴에 박힌 창을 거칠게 뽑아냈다. 아시아는 바닥으로 고꾸라져 피를 토했다. 자신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소매에서 불타는 돌을 꺼내 아시아의 상처 속에 밀어 넣었다.


아시아는 비명을 질렀으나, 동시에 세포 하나하나가 재생되는 감각을 느꼈다. 그녀는 고통을 참으며 명왕을 올려다보았다.


“돌을 빼내라, 태초의 짐승이자 가장 위대한 점성술사인 내게 이런 돌 따위는 필요 없어. 네놈이나 가져라.”


명왕은 그런 그녀가 가소롭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사손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사랑했던 아들이 괴물이 되어 아버지에게 검을 휘둘렀다. 아들의 훈육은 가혹했다.


그는 전과 같이 곡도로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듯했으나, 아시아의 눈은 속이지 못했다. 불타는 돌을 넘겨준 후, 왕의 붉은 비단옷은 피로 젖어들고 있었다. 그는 아들의 공격을 온전히 막아낼 수 없었다.


아시아는 불타는 돌에 기대어, 가슴의 통증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한 손이 없는 아들을 염려하던 명왕은 가벼운 붓을 놀리듯 손가락으로 곡도를 돌려 허공에 원을 그렸다. 그 부드러운 검술에 사손의 남은 왼손마저 떨어져 나갔다.


허나 왕은 아들의 목을 벨 수 없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냉혈한이라 해도, 그 찰나의 망설임은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사손은 짐승처럼 달려들어 왕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명왕의 목혈관이 뜯겨나가며 붉은 피가 솟구쳤다. 그는 피를 쏟으며 불타는 숲, 볼품없는 고목에 몸을 기댔다.


사손은 죽어가는 아버지를 외면한 채 아시아와 돌을 향해 다가갔다.


아시아는 돌에 기대 앉아 양손이 잘린 사손에게 창을 겨누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신의 별은 본래 가장 희미해 눈에 띄지 않는 법이었다.


그 별이 급히 빛을 뿜었다. 아시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했다.


사손은 힘이 빠진 그녀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동시에 대지가 요동쳤다. 시체들이 나뒹굴고 천둥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흔들리는 땅 위에서 균형을 잃은 사손이 다시 한번 아시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하늘을 바라본 괴물의 동공에 거대한 파도가 비쳤다.


아시아는 하늘로 승천하는 백색 광휘를 목격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해일이 남쪽 야만의 땅을 집어삼켰다. 해일은 돌을 부수고 대지의 모든 불꽃을 꺼뜨렸다. 시체와 피, 불로 얼룩진 땅은 파도에 의해 씻겨 내려갔다.



불이 꺼진 자리에 피어오른 연기가 하늘을 가득 메웠다.




고목에 기대앉은 명왕이 눈을 떴다.


주변에는 피도, 불꽃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황량한 대지에 홀로 남은 그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괴물도, 불타는 돌도, 마녀도 없었다.


그는 선조들이나 빛의 형상이 자신을 데리러 오리라 예감했다.


그때 연기에 휩싸인 숲 한편에서 백마 한 마리가 천천히 걸어왔다. 백마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등에 타라는 듯 앞발로 땅을 긁었다.


그는 솔로몬을 떠올렸다. 그리고 선조들이 남긴 말을 상기했다.


계몽은 사람들의 머리가 아닌 영혼을 일깨운다.


그는 백마에 올라타 하늘로 향했다.


그는 북쪽 설산을 제외하고 모두 바다에 잠겨버린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수몰된 대지에서 솟아오르는 별들을 보았다. 푸른 땅 위에서의 고난을 끝내고 별이 되어가는 영혼들. 이제 자신도 별이 될 차례임을 직감했다.


그때 백마가 북쪽 땅을 향해 은빛 운석과도 같이 급강하했다.


이내 신성한 말이 그를 가차 없이 지상으로 내던졌다.



추락하는 속도에 놀라 눈을 뜬 명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허름한 천막 안이었다. 잠에서 깬 그는 몸에 꽂힌 침들을 뽑아냈다. 목에 감긴 붕대의 감촉이 서늘했다.


바람에 천막 입구가 펄럭이자, 그 틈으로 눈 내리는 설원이 보였다. 그리고 천막 앞을 지키고 있는 사내의 등이 보였다.


거대한 체구, 붉은 머리에 도끼창을 든 사내.


그는 안도하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설산에 태양 빛이 닿았다. 수도원 안뜰의 눈은 녹아내리고 꽃이 피어났다.


이삭과 사혈은 설산 암벽에 앉아 변해버린 대지를 내려다보았다. 바다 중앙의 폭풍도, 불타는 남쪽 땅도 사라졌다. 대지의 형상은 바뀌었고, 그들의 고향은 바다 깊이 잠들었다. 그들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대지의 모습이 드러나고 있었다.


초월적 짐승들이 신화 속으로 사라진 대지를 향해 이삭과 사혈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진흙으로 뒤덮인 길을 걸으며, 발에 달라붙는 진흙에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때 이삭의 발에 무언가가 채였다. 그는 진흙 속에서 그것을 파냈다.


어린 소년이었다. 거대한 해일에 휩쓸려온 아이는 가냘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혈이 힘으로 소년을 진흙 구덩이에서 꺼내 올렸다. 묻은 흙을 털어내자 이삭이 소년의 입에 숨을 불어넣었다.


의식이 돌아온 소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이삭은 아이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준 남자가 되었다.


“아담. 아담 카드몬.”


세 사람은 발길을 돌려 설산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삐걱대지 않는 문을 열고 재건된 수도원에 들어섰다. 명왕을 포함한 석공들은 탁자에 도시 계획도를 펼쳐 놓고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아담은 수도원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냈다. 그의 머릿속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지식으로 채워져 갔다.


허나 설산의 사내들은 몇 가지 질문에는 끝내 침묵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무엇입니까?”


“그것들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가장 빛나는 저 하얀 별은 무엇입니까?”


“별을 올려다보는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석공들은 아담에게 그들의 모든 지식과 지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랑이 담긴 서신을 건넸다.



편지를 품에 안은 아담은 산을 내려와 대지를 여행했다.



소년은 사람들을 만나고 집을 지었다. 설산의 사람들이 전수한 지식으로, 아담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했다. 삶에서 허기와 공포, 죄가 사라질 것임을.


아담의 머리가 하얗게 세고, 긴 수염이 가늘어지며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질 무렵.


바위에 앉아 양을 쓰다듬던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아담은 그중 가장 밝게 빛나는 하얀 별을 응시했다.


솔로몬 역시, 노인이 된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Wonder if you've seen all the dreams i was dreamin'.

Count your blessings Love.

For the flower in my empty garden. My nostal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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