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죽였다>와 <타임 투 킬>
가정 폭력, 학교 폭력, 군대 폭력, 지역 사회 폭력, 국가 폭력...
일상으로 묶여 있는 크고 작은 인간 집단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들을 다루는 허구의 작품들이 넘쳐난다.
그 대부분의 작품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바는 대체로 가해자의 잔인성과 피해자의 고통이다.
여기에 흔히, 피해자의 고통에 주변이나 사회가 얼마나 무심하게 혹은 부당하게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장면들이 병치된다.
요즘 보고 있는 한국 드라마 <당신이 죽였다>(원작,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나오미와 가와코>)도 비슷한 듯하다.
살아서는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도저히 벗어날 수 없어 투신자살하려던 희수가 친구 은수의 설득으로 은수와 함께 남편을 살해한다, 정도로 주요 서사를 요약할 수 있겠다.
조희수와 조은수의 심정을 따라가며 진지하게 보고 있다.
그런데 4화에 접어드니 ‘이 작품의 작가나 연출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본 회차의 화면 구성과 대사는 가정 폭력 피해자인 아내들의 고통과 절망을 보여주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그녀들의 고통에 무심하거나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시댁 식구들과 경찰의 모습은 조희수와 조은수가 노진표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지 작품의 전경은 아닌 듯하다.
아직 끝까지 보지 않아 결말을 모르니 작가나 연출자가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일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쯤에서, ‘폭력’에 대해 말하는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가 그렇듯 이 작품 또한 피해자의 고통을 클로즈업하고 반복하여 보여주는 방식이 꼭 필요할까,라는 생각이 맴돈다.
어쩌면 하고 싶은 말을 영상으로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하다’기보다 시청자가 주인공의 처지에 공감하게 하거나, 시청자의 긴장감을 끌어올리거나, 자극적 영상으로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방책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목적들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대중 매체이자 상업 매체 아닌가.
하지만 지난 주말에 본 영화 <타임 투 킬Time to kill>(원작, 존 그리샴의 <A time to kill>)이 아동 성폭행을 형상화하고 주제와 연결 짓는 방식은 1996년 영화인데 오히려 새로웠다.
아동이 성폭행당하는 장면을 노골적으로 영상에 담는 행위가 불법이거나 금기여서 마지못해 택한 우회로일 수도 있다.
그러나 결말을 통해 확연히 드러낸 메시지를 고려하면, 이 방식이 다만 우회로가 아니라 영화의 메시지와 직결된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영화 도입부 영상들에서 10살 흑인 소녀 타냐가 두 백인 청년에 의해 성폭행, 폭행, 살해 시도를 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은 암시적이거나 절제되거나 부분 컷으로만 구성된다.
관객은 타냐에 대한 성폭행과 살해 시도가 있었다는 정도의 피상적 정보만 제공받은 채 영화의 결말부까지 인도된다.
그리고 타냐를 성폭행한 두 백인 청년을 살해한 타냐의 아버지가 그 행동의 유무죄에 대해 최종 판결을 받는 재판 장면에 이른다.
변호사 제이크는 마지막 변론에서 배심원들에게 말한다.
“저는 모두가 법 앞에서 평등하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건 진실이 아니죠. 법의 눈은 사람의 눈이고 서로를 동등하게 보기 전까지는 정의는 실현되지 않고 편견만이 반영될 뿐입니다. (...) 두려움과 혐오감이 편견을 조장하는 머리의 ‘정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런 것을 모르는 마음으로 진실을 찾아야 합니다. 한 가지 얘기를 들려드리죠. 제가 얘기하는 동안 모두 눈을 감아주시죠. 저와 여러분 마음이 말하는 바를 들으십시오.”
영화는 제이크의 입을 통해 타냐가 당한 일을 비로소 구체적으로 ‘들려준다’.
영화 속 배심원뿐 아니라 현실의 관객조차 도입부에서 ‘보지 못한’ 일들을 마음으로 그리며 알게 된다.
타냐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한 묘사를 마친 제이크의 마지막 말은 이것이다.
“그 애가 백인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나는 흑인도 백인도 아니지만,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정신의 눈’을 감고 ‘마음의 눈’으로 볼 때 비로소 온전한 ‘공감과 진실’에 이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이보다 잘 보여줄 수 있을까.
물론 이 영화는 백인 청년들에 의해 흑인 소녀가 성폭행당한 사건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미국의 한 남부 사회에서 백인이 흑인에 대해 갖고 있는 적대감, 우월감, 편견이 얼마나 극악하고 공고한지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고 있다.
그러니 굳이 타냐가 폭행당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필요는 없었을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이런 작품을 만든다면 어떨까.
꼭 필요하지 않으니 폭행 장면을 굳이 넣지 않거나 클로즈업하지 않을까.
(아동 성폭행 장면을 노골적으로 촬영하거나 보여줄 수 없다는 법이나 금기가 없다는 조건이라면 말이다.)
송혜교 배우가 주연한 <더 글로리>를 보면서도 막연히 느꼈던 불편함은 이처럼 잔혹한 폭행 장면을 영상화한다고 해서 우리가 학교 폭력에 한층 경각심을 갖게 될까,라는 것이었다.
폭력적 장면들에 얼마간 면역이 생겨버린 ‘눈’ 말고, 이면의 진실에 이를 수 있는 ‘마음’을 자극할 다른 방도는 없는 걸까.
난 창작자가 아니니까 이렇게 쉽게 말해 버린다.
창작자여, 부디 용서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