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유기된 자의 분투기
집을 나갔던 오빠는 몇 달 후 여름에 나타나, 나를 인근 검정고시 학원 야간반에 등록시켰다. 인천 어디 치킨집에 취직해 배달일을 하며 내 학원비를 마련해 온 것이었다. 아버지가 모든 돈을 가져가,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오빠가 생각해 낸 대안이었다.
그런데 개강일로부터 이미 몇 개월이 지나 있어 모든 과목의 진도가 꽤 나간 상태였다. 알파벳조차 몰랐던 나는 모든 과목의 놓친 단원들을 혼자 공부했다. 어느 날, 버스에 앉아 내다본 자동차들 뒤에 붙은 차 이름을 스스로 읽은 순간의 놀라움! 바로 그 순간, 난 다른 세상에 들어섰다. 모든 배움이 흔쾌했다.
하지만 내가 학원을 가기 위해 늦은 오후에 가게를 나선 첫날부터 아버지는 내게 입을 닫았다. 먼저 말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얼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난 더 이상 아버지의 냉대에 꺾일 만큼 어리지도, 유약하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 합격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가게가 위치한 성남시 안에는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반을 운영하는 학원이 없었다. 서울로 다니려면 학원비에 교통비까지 필요했다. 하지만 오빠는 더 이상 내 교육비를 마련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시 살림과 가게에 매달려 시들어 가던 나의 열일곱이 끝나가던 즈음, 언니가 나타났다. 20대 초반이 된 언니는 안양 어느 반지하 단칸방에서 남편 그리고 어린 아들과 살고 있었다. 언니의 남편은 일을 하는 날보다 하지 않는 날이 더 많은 듯했다. 언니는 어린 아들을 돌보며 온갖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고 있던 언니가 나를 서울 소재 검정고시 학원에 등록시켰다. 그나마 다행히도 그 학원은 매달 월말고사를 치러, 주야간 통합 석차 3등 이내 학생들에게 학원비를 면제해 주었다. 나는 그 석차가 필요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집안일과 가게 일을 하다 늦은 오후에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쯤 걸려 학원에 도착했다. 밤 10시에 수업이 끝나고 집에 오면 자정이 다 되었다. 주야간을 합쳐 천 명에 가까운 학원생들 속에서 전체 석차 3등 안에 드는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하루 서너 시간을 자며 공부해 대체로 학원비 면제를 받았고, 받지 못하는 달은 언니 또는 선생님의 도움을 받았다. 늘 잠이 부족해 몸은 피로했지만, 공부가 즐거웠다. 그래서 나는 홀로 치열하고 홀로 찬란했다.
이듬해 4월,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함께 공부했던 이들의 도움으로 학력고사반에 등록했다. 그해 본 학력고사 점수가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에 갈 만했고, 등록금을 지원하겠다는 이도 있었지만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중학교 3학년이던 동생이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시기였다. 동생이 학교에서 가져온 고등학교 지원서에 아버지는 이번에도 서명하지 않았다. 돈이 없다고 했다. 이번 담임 선생님은 학교로 아버지를 부르지 않았다. 난 어떻게 해야 하고, 동생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갈팡질팡하는 머리로 가게 일을 보던 어느 날, 노트 사이에 숨겨져 있던 아버지 명의의 통장을 발견했다. 예금액이 6백만 원이 넘었다. 돈이 없다는 말이 사실은 아니리라 짐작은 했었지만, 막상 예금 액수를 확인하는 순간 내 안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자. 학교를 다니든 못 다니든, 더 이상 아버지와 살 수는 없다.
우선 혼자 집을 나와 친구 집에서 지내며 인천 주안의 공단을 돌았다. 고졸학력 생산직 공원을 구하는 몇 곳에 이력서를 냈지만, 검정고시 학력은 고졸로 인정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 검정고시 합격증은 대학 갈 때만 소용 있는 물건이라는 현실을 몰랐던 것이다. 아득했다. 친구 집의 밥을 축내는 날을 하냥 늘릴 수도 없었다.
그즈음 오빠에게 연락이 왔다. 영장이 나왔다는 것이었다. 가벼운 장애이다 보니 면제도 아니고 현역도 아닌, 당시 용어로 ‘방위’ 복무 영장이었다. 복무 기간이 대략 3년이었다. 아버지가 받아줄 리 없었다. 내가 해야 했다.
언니가 마련해 준 월세 보증금으로 인천 한 산동네에 단칸방을 구해 오빠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곧 나는 오빠 친구가 일하는 작은 전자회사에 공원으로 들어갔다. 학력이 필요 없는 회사였다. 일자리를 구하자마자 아버지 모르게 동생을 데리고 나왔다. 그렇게 셋이 사는 삶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우리가 아버지를 버린 것이었다. 이제 내가 오빠와 동생을 책임져야 했다. 최소 3년 동안.
갚아야 했다. 아버지가 소식을 끊었을 때 오빠는 동생들을 때렸을망정 버리지 않았었다. 병든 채 죽어가던 동생은 오빠뿐 아니라 나의 매를 받아내야 했었다. 학교에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오빠는 집을 나가 일해 번 돈으로 나를 학원에 보냈다. 그 와중에 정작 자신은 독학으로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마치면서까지. 그 모든 마음의 빚을 갚아야 했다.
대학을 포기한 일을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사회생활을 할수록 내 평생 가장 잘못한 선택이었다는 사실이 순간순간 되살아났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채로 시계를 되돌려, 똑같은 상황으로 돌아간다 해도 난 같은 선택을 하게 되리라. 착해서가 아니다. 미안해서만도 아니다. 형제간의 우애도 아니다.
그건 함께 고통을 겪은 이들 사이에 생겨난 의리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며 무언가를 깨우친 내 머리가 그것이 옳은 일이고, 이치에 맞는 일이라고 명확히 말하기 때문이었다. 검정고시 자격증이 현실에서 내게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흔히 취업이나 대입 자격을 얻기 위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 중고등과정의 공부를 하며 홀로 발 들인 다른 세상에서, 난 이치를 따지는 머리를 갖게 돼 버렸다.
그래서 만족스럽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방위 복무 기간 동안 오빠는 야간에 전산훈련원을 다녀 전역 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할 수 있었다. 그 기간에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를 마치고 대입 준비를 하고 전문대에 입학했다. 내가 잃은 것과 형제들이 얻은 것을 저울에 달면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분명한 것은 중고등학교 과정을 공부하는 동안 내 머리에 굳건히 뿌리내린 의문 하나가 전자회사 공장의 공원이 된 나를 독하게 괴롭히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답을 얻지 못한 그 의문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