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창 예쁠 나이. 아니, 진짜로 예쁜 나인 나, 허영실.
이름은 좀 촌스러울지 몰라도, 세련된 외모엔 이런 반전 한 스푼쯤은 오히려 좋지.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들도 나를 사랑한다. 세상 모든 남자는 나를 사랑한다.
진짜 마누라한테 목줄 잡혀 있지 않은 이상은.
다른 여자들이 가슴골 파인 운동복을 입고 헬스장을 들어갈 때, 나는 밖으로 나간다.
내 오피스텔 앞 대단지 아파트. 그 앞에 호수를 둘러싼 산책로. 거길 나는 뛴다.
한 듯 안 한 듯, 사실은 무진장 공들인 생얼 메이크업. 운동할 때 머리는 무조건 포니테일. 라인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핏. 하얀 피부가 더 빛나보이는 하얀색 상의와 검정색 하의. 다리가 더 길어 보이고 발이 얄쌍해 보이는 러닝화.
준비 끝. 이제 사냥 나가볼까. 물? 음료? 그런 걸 왜 내가 챙겨가. 어련히 챙겨주는 남자들이 있을 텐데.
엘리베이터도 내 시간에 딱 맞춰 열린다.
- 띵동 -
잠시 멈췄다.
3층 남자.
"어? 영실 씨, 주말에도 운동하시네요."
평균 얼굴과 평균 키. 스타일은 평균 이하. 근데 돈이 모든 평균을 뒤집는다. 대기업을 제 발로 나와 사업을 열자마자 상한가를 친 남자.
차도 바꿨던데. 슬슬 장난이나 쳐볼까?
"상한 씨 오늘 약속 없어요?"
"네? 네! 없어요."
그의 얼굴이 귀까지 빨개진다.
"오늘 와인이 잘 어울리는 날씨 같네요."
"와인요?! 제가 좋은 곳 아는데... 혹시 오늘 시간... 되세요...?"
내 말 한마디에, 훅 물어버린다.
그럼 그렇지.
그의 명함을 받고 돌아선 내 등 뒤가 뜨겁다.
그만 봐라, 나 뚫리겠다.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피부를 따라 미끄러진다. 사람이 바글바글. 젊은 여자들 비율이 확 늘었다. 부자 동네라고 SNS에 소문이라도 났나?
일단 땀부터 조금 내보자. 반바퀴 정도는 진심으로 달린다.
커플들이 팔짱을 끼고 걷는다. 이런 날씨에 데이트 나온 커플들은 어떤 기분일까.
난 단 한 번도 진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내 연애는 대가성 거래다.
나는 남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남자들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 난 그들의 돈을 사랑한다.
사랑이 없어도 설렐 수 있다. 조건으로도 충분히 떨린다. 그게 편하다.
사랑은 손해다. 사랑은 지옥이다.
"영실아!"
윤부남.
작년쯤인가 와이프가 눈치챘다며 나와 관계를 정리한 남자.
걷다가도 뛰다가도, 사람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간다.
"영실이 너 이사 왔어? 더 예뻐졌네... 번호 바뀌었더라?"
와이프한테 걸리고도 연락했었나 보네. 한심하다.
"목마르지? 이것 좀 마셔."
네가 물을 왜 주니. 내가 네거나 받아 마시려고 텀블러를 두고 온 게 아닌데.
"그때 와이프만 아니었어도... 이따 시간 돼? 백화점 갈까? 번호 좀 찍어줘."
그때였다.
"야, 윤부남 이 망할 인간아!!!"
와이프 등장. 바닥을 울리며 불길처럼 달려온다. 이럴 땐 모르는 척 떠나는 게 정답이다. 뒤에서 둘의 언성이 찢어진다.
결혼은 지옥이다. 사랑은 지옥이다. 약속은 지옥이다.
사랑? 믿음? 약속? 영원?
웃기지 마.
애초부터 그런 건 내 인생에 없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