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의 끝에서, 다시 그리움으로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의 아버지는 여전히 그 자리에 계신다.
젊은 날에는 그 존재가 버거웠고, 때로는 멀게만 느껴졌다.
무엇이든 단호했고, 웃음보다 침묵이 먼저였던 그분의 모습 속에서
나는 오래도록 거리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 침묵이 바로 사랑의 다른 얼굴이었다는 것을.
어릴 적, 호롱불 아래서 글자를 가르쳐 주던 아버지의 손등은
늘 거칠고 따뜻했다.
그 손끝에는 말로 다 하지 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
그리고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내색하지 않던 체념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손을 붙잡고 자라면서,
언젠가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에 새겼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내 인생의 거울이었다.
그분의 모습 속에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를 배웠고,
때로는 닮고 싶지 않던 모습 속에서도 결국 나 자신을 보았다.
젊은 날에는 그 그림자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분의 말투, 표정, 생각이
어느새 내 안에도 자리 잡고 있음을 느낀다.
그 닮음이 더는 부끄럽지 않다.
그것이 삶의 연속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처럼 살지 마라.”
그 말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토지개혁으로 모든 땅을 잃고,
삶의 무게를 혼자 견뎌야 했던 당신의 세월이
그 짧은 한마디 속에 다 담겨 있었을 것이다.
힘들었던 자신의 길을 자식에게만큼은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것이 당신식의 사랑이었음을 이제야 안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늘 “열심히 노력해라”라는 말을 반복하셨다.
그 말속에는 ‘희망만큼은 잃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이 숨어 있었다.
아버지의 시대는 사라졌지만,
그분이 남긴 가치들은 내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책임, 절제, 그리고 사랑.
그 세 가지는 아버지가 말없이 가르쳐 준 인생의 교과서였다.
나는 그 교과서를 따라 살아왔고,
이제는 나 또한 누군가에게 같은 가르침을 남기고 싶다.
삶이란 결국 그렇게 이어지는 것 아닐까.
누군가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을,
다시 다른 이가 걸어가며 같은 자리를 밟는 것.
가끔은 그립다.
늦은 밤 마당 끝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의 뒷모습,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던 새벽의 발자국 소리,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내 등을 토닥이던 그 손길이.
이제는 그 모든 것이 한 편의 장면처럼 마음에 남아 있다.
그리움이 슬픔이 아니라
나를 살아 있게 하는 기억의 힘이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아버지를 완벽한 존재로 기억하지 않는다.
그분도 한 사람의 인간이었고,
넘어지고 후회하고, 다시 일어섰던 분이었다.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완전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한 채로도 충분히 전해질 수 있다고.
이제 나는 그분의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내 안의 또 다른 아버지를 떠올린다.
아버지의 삶이 끝이 아니라
나의 삶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고, 따뜻하다.
그리움은 지나가도, 마음은 남는다.
그리고 그 마음이 누군가의 하루를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비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