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노마드 가이드북 #11
노마드라 하면 뭔가 정처 없이, 그리고 쉴 새 없이 떠도는 사람들일 것 같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주를 떠도는 대부분의 디지털 노마드들은 자신만의 리듬에 맞추어 짧고 긴 정착과 여행을 반복하는데요.
저 또한 첫 베이스캠프에서 딱 한 달만 머물고 다른 곳으로 떠나겠다던 계획을 수정하고 말았습니다. 한 달이 두 달이 되고, 두 달이 다섯 달이 된 지금 저는 완전히 새로운 삶의 한 장면을 여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스스로 이 선택에 대한 정리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소개하는 것이 이번 이야기의 내용입니다. 다음 연재부터는 노마드 네 분의 인터뷰를 진행할 예정이니 제 이야기로는 마지막 연재가 되겠네요.
운명을 믿나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저는 지금 디지털 노마드로서 첫 베이스캠프였던 완도에서 '완도살롱(wandosalon)'이라는 술 파는 서점의 오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최소 2년 동안 완도살롱은 동네서점이자 칵테일바인 동시에 코워킹 스페이스이며 제가 글을 쓰고 일하는 공간이 될 예정입니다.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 중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살롱 오픈을 준비하는 저와 디지털 노마드 라이프는 맥락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제가 이렇게 '임대차 계약서'를 쓰고 '공간'을 기획하고 꾸미며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선택을 내리게 된 이유는 아마도 운명 때문일 것입니다. 완도의 골목을 거닐던 중 우연히 '임대'가 써붙여진 노포를 발견했고, 평소 관심이 많았던 책방을 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판단이 들어 곧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해버린 것입니다. 계약 과정에서 이 곳이 수십 년 전에 서점으로 운영되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회의론자였던 저로서도 운명의 존재에 대해 믿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을 계약한 것은 단지 서점 영업만을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상가 안쪽에 있는 살림 공간에서 지내며 일과 삶, 그리고 꿈을 동시에 누릴 작정이었으니까요. 그랬던 공간이 친구와 동업을 결정하게 되고, '칵테일바'라는 컨셉을 더하면서 또 한 번의 변화를 겪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공간을 대하는 태도는 처음과 같습니다. 서점 운영을 하는 동시에 '글을 쓰고', '노마드 라이프를 위해'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공부와 일을 계속할 테니까요. 자신만의 장사를 해보고 싶다던 친구 녀석의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쁩니다.
왜 하필 살롱?
공간에 서점이 아닌 살롱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용감한 결정이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살롱이라 하면 미용실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만들고 지내는 이 공간이 서점과 술집이기 이전에 사랑방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코워킹 스페이스나, 밋업 콘텐츠, 그리고 아지트가 없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완도의 젊은 예술가들과 프리랜서, 그리고 노마드들을 수면 위로 드러나게 하고 싶은 제 간절한 마음도 이름에 담겨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완도살롱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책과 술 두 가지지만 이곳의 중심은 책도 술도 아닌 사람입니다.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공간이 없어 집에서 혼자 캔맥주를 들이켜야 했던 이방인들과 문화와 예술, 교양에 목말라 있던 모든 이들에게 열린 공간이 바로 완도살롱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독립 출판(내 책과 누군가의 책)과 여러 가지 밋업을 열어 볼 요량인데요. 제 필생의 목적이자 무한 동력이 될 '인세 소득'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볼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친구 녀석이 맡은 칵테일이라는 아이템이 창작 활동이나 모임에 아주 큰 도움이 될 것 같아 기대가 큽니다.
두 번째 베이스캠프
이제 막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려는 타이밍이지만, 저는 지금도 다음 베이스캠프에 대한 생각을 게을리하지 않고 있습니다. 손님은 얼마나 모실 수 있을 것이며, 살롱의 매출은 어느 정도일지, 제가 그리고 있는 그림들이 제대로 그려질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것도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제가 선택한 디지털 노마드라는 라이프 스타일은 제 마음만 변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뜻대로 계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베이스캠프에서 곧바로 2년짜리 임대차 계약서를 써버린 디지털 노마드의 이야기라니. 여러분이 기대한 것과는 다른 결말일까요? 저로서도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하며 즐겁고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요.
때로 행운이 운명을 가장해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제게도 해당되는 것이길 바랍니다.
완도살롱 만세!
브런치 목요 위클리 매거진 디지털 노마드 가이드북의 다음 연재는 우주를 떠돌고 있는 노마드들, 또는 노마드 데뷔를 준비 중인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