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빨간오렌지나무카페를 찾아 떠나는 여정
(2024년 3월 1일)
지중해의 태양은 힘이 세다. 순식간에 모든 걸 바삭거리게 만든다. 조금 전 세차게 비를 퍼부은 구름이 민망할 정도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에 나는 가끔 화가 난다. 지중해의 날씨는 변덕스럽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터널 하나 지났을 뿐인데 기척 없던 검은 먹구름이 기차를 위협하기 시작한다. 뭐, 곧 있으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태양이 고개를 내밀겠지만.
30분 뒤 나는 타오르미나에 도착할 것이다. 오늘의 계획은 단일하다. 도시 어딘가 꼿꼿하게 서 있을 ‘Oranges Bar Cafe’를 찾아가는 것이다. 2008년 방영된 ‘세계테마기행 시칠리아’ 편에서 선배 작가 김영하가 숨을 돌렸던 바로 그 카페다. 나도 그처럼, 카페의 상징인 빨간오렌지나무가 만든 그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글을 쓰며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귀국까지는 아직 세 번의 밤이 남아 있지만, 나는 오늘 이곳 타오르미나에서 여행을 마무리할 것이다. 긴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곧 시작될 새로운 여정들을 준비한다고 말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한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것들에게 나의 몫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 도민체전에 출전하는 완도군 축구 대표팀의 일원으로, 목포대학교 학생들의 멘토와 전라남도 로컬 크리에이터, 그리고 너무나 그리운 완도살롱의 왕좌로.
문득 로마에서 묵었던 숙소 앞 카페의 이름도 ‘오렌지’였던 게 떠올라 나는 미소를 짓는다. 여정을 마무리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마치 우리네 인생처럼, 머리와 꼬리가 같은 이 구조를 나는 너무나도 애정한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결코 의도한 건 아니다. 알다시피 난 그렇게 치밀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빨간오렌지나무카페’는 그곳에 없었다.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길래 오래되어 보이는 상점에 들어가서 물었더니 “아, 거기 주인이 바뀌었어요. 이름도 바뀌었고.”라는 대답을 듣게 되었고, 바뀌었다는 카페를 찾아가니 그마저도 사라지고 없었다. 열매가 덜 익은 오렌지나무 두 그루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어쩐지 검색에도 나오지 않더라니...(내가 뭐라고 했던가? 나는 치밀한 사람이 아니...)
허탈한데다 화창한 날씨 덕분에 진을 다 뺀 나는 아무 카페에 들어가 에스프레소와 젤라또를 비벼 먹었다. 지금껏 이탈리아에서 먹었던 그 어떤 것보다도 달콤했다.
순식간에 기운을 되찾은 나는 다시 열정적으로 타오르미나의 돌길을 걷기 시작한다. 앞서는 보이지 않던 아기자기한 골목과 편집숍들이 눈에 들어왔다. 쇼핑을 조금 하고, 사람 구경을 많이 했더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이 흐렸다.
바로 지금,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한 지금이야말로 떠나기에 더없이 좋은 때라는 걸, 나는 본능으로 알았다. 물론, 변덕스러운 날씨를 믿고 일몰에 도박을 걸어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지금이 분명 떠나기에 가장 좋을 때였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타오르미나를 벗어나는 길에 다시 한번 빨간오렌지나무카페(가 있었던 자리)를 지나쳤다. 이를 빌미 삼아 여행을 더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직 여행을 끝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굴뚝처럼 솟아났다. 많이는 아니고 아주 조금만 더 여행하고 싶다는 그 생각을, 나는 아주 많이 했다.
그날 저녁에는 처음으로 한식당에 갔다. ‘판다’라는 이름의, 일본식 인테리어에, 식탁은 마작으로 디자인한 기묘한 곳이었다. 그러나 샤워에 향수까지 뿌리고 외출한 성의가 무색하게도 갑자기 쏟아진 비에 나는 온몸이 젖은 채로 판다에 입성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김치찌개만큼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레몬의 섬’답게 시큼하게 우려낸 것이 의외로 맛이 좋았다.
식사를 마치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 도시를 걸으며 나는 오늘 하루가 꽤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하나 마음처럼 되는 것이 없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을만한 것도 없다고.
길 건너에 아직 문을 연 서점이 보인다. 나는 읽지도 못할 책이 한 권 사고 싶어져 서점으로 발길을 옮긴다. 곧 다시 비가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망설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