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 오늘을 살아가는 법

by 조가

12장. 오늘 —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의 연결고리

당신은 과거와 현재, 미래 중 무엇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철학자들은 현재를 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모든 것을 잊고 현재만 살 수 없다. 우리는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계획하며 산다. 그렇다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후회에 머물 것인가, 미래만을 위해 살 것인가?

나는 둘 다 아니라고 답한다. 두 선택지가 소중하다는 걸 알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다.

바로 연결고리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 현재와 미래의 연결.

과거에 머무르지 말고, 배운 기억과 경험을 들고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후회가 소중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다만 후회에 빠지기엔 현재가 너무 아깝다. 그래서 나는 현재를 산다.

또 인간은 절대 현재만 살지 못한다. 현재만을 산다면 인간이 아니라 검은 머리 짐승일 것이다. 나는 되도록 미래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않으려 하지만, 아마 무의식 속에서 여전히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 사실 미래를 생각한다는 건 거창한 설계도가 아니라, 오늘을 반복해서 살아내는 의식이다.

하루를 보내고, 잠을 자고, 다시 일어나는 반복. 거기에 담긴 질문—그 반복은 의지인가?

오늘의 삶이 행복하면, 미래의 삶도 행복해질 확률이 높다. 그러니 오늘의 한 줄을 잘 쓰자. 과거에서 가져온 배움으로, 미래로 이어질 지금 이 순간을.


13장. 의지가 없다면

아침에 눈을 뜬다. 몸은 깨어났지만 마음은 어딘가 갇혀 있다. 해야 할 일이 떠오르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유 없는 두려움이 안개처럼 가슴을 덮는다.

“어떻게 해야 하지?”—익숙한 질문이 다시 재생된다.

의지가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살아야 하니까 산다”는 말은 때때로 위로가 되지만, 때로는 공허하다. 그게 전부일까?

불안과 무기력이 손잡고 찾아오는 날, 나는 움직이지 못한다. 해야 한다는 생각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의심이 맞붙는다. 삶은 무엇이며, 노력은 어디로 가는가. 반복은 왜 이렇게 나를 지치게 하는가.

의지가 없다는 것은 나약함일까, 자연스러운 상태일까? 아마 둘 다일 것이다. 우리는 기계처럼 영원히 강할 수 없다. 때로는 고장 나고, 때로는 멈춰야 한다. 중요한 건 그 멈춤 속에서도 여전히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럴 때 나는 묻는다. “지금, 단 하나의 작은 일만 한다면?”

일어나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일, 창문을 열고 바람을 들이는 일.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그 작은 행동이 다시 나를 살게 한다. 의지가 없을 때 삶은 작아지지만, 오히려 더 본질에 가까워진다. 거창한 목적이 아니라 사소한 움직임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것이면 충분하다.


14장. 의지의 정의 — 위대하지 않은 끈

당신은 의지를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나처럼 한때 의지를 거창하게 생각했는가?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의지란, 삶이 의미 없어 보이는 순간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으려는 선택의 힘.

의지가 사라지면 인간은 존재하되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된다. 숨은 쉬지만 삶을 밀어가는 중심축이 사라진다. 그러나 의지는 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다. 넘어지고 무너지는 순간에도 아주 미세하게 남아 있는 생의 끈—그것이 의지다.

의지는 종종 위대하지 않다. 그저 오늘을 견디는 것, 한 걸음을 떼는 것, 지금 이 순간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소박한 의지가 내일의 나를 호출한다.


15장. 마음이 마비되면

가끔은 감정이 사라진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분노도 없다. 그저 공허하다. 사람들은 무기력이라 부르지만, 내겐 마음의 마비처럼 느껴진다. 의지가 없을 때는 움직이지 못하지만, 마음이 마비되면 움직일 필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내 삶의 관객이 된다. 그때 묻는다. “나는 지금 살아 있는가?”

살아 있다는 건 심장이 뛴다는 뜻만은 아닐지 모른다.

마음이 움직여야 비로소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마비는 나약함이 아니라 방어

상처가 너무 깊으면 감각을 끊는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은 무감각으로 대체된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너무 무거우면 마음은 잠시 작동을 멈춘다. 마비는 정신의 비상대응 체계일 수 있다.

회복은 어떻게 오는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나는 온전히 믿지 않는다. 시간만 흘러도 마음은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 어떻게 버티느냐, 무엇을 붙잡느냐가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작은 감각부터 되살린다.

따뜻한 차 한 잔의 온기

노을 지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간

말없이 곁을 내어주는 존재의 온도

이 사소한 것들이 마비된 마음에 아주 약한 전류처럼 생기를 흘려보낸다. 마음은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다. 천천히, 조용히,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돌아온다.

그래서 나는 기다린다. 억지로 울지도, 기뻐하지도 않는다. 내가 나를 통과해 지나가길. 작고 소소한 경험에 감사하며, 다시 움직일 마음이 올 때까지.

마음의 마비는 끝이 아니라 잠시 멈춘 숨이다. 숨이 돌아오면 마음도 따라온다.


16장. 생각 없이 몸이 움직일 때 — 무의식적 생존에서 깨어나기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일어나고, 씻고, 먹고, 일하고, 돌아와 누웠다. 나는 언제 살아 있었던가?

몸은 움직였지만, 나는 느끼지 않았다. 행동은 있었지만 인식은 없었다. 그 하루는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나간 것이었다.

무의식적 생존

반복되는 루틴 속에서 몸은 스스로 움직인다. 알람—커피—업무—대화—소모. 그 사이에 나는 있었는가? 나는 주체인가, 아니면 피동적인 기계인가?

생각 없이 사는 건 편하다. 갈등이 줄고, 성찰의 통증이 없다. 그러나 그 삶은 의미 없이 지나간다. 아무리 잘 살아도, 내가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깨어남을 부르는 질문

고통스럽지만 묻자. “나는 지금 내 삶을 살고 있는가?”

왜 일어났는가, 왜 이 일을 지속하는가, 왜 반복을 끊지 못하는가. 이 질문들이 쌓일 때 비로소 삶은 내가 살아가는 삶이 된다.

생각 없는 날의 한 줄기 깨어있기

그런 날에도 하나만 의식하자.

손끝의 감촉

심장의 박동

한숨의 온도

이 작은 인식이 몸과 마음을 다시 연결한다. 생각 없는 움직임은 살아 있으면서도 죽어 있는 상태지만, 단 하나의 의식이 생기를 되돌린다.

“지금 움직이는 이 몸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이 한 문장으로도 나는 나를 다시 느낀다.

자기 삶을 되돌리는 다섯 가지 방법

작은 감각 훈련: 발바닥의 압력, 따뜻한 물의 감촉, 말 없는 정적을 의식하라. 잃어버린 ‘나’와 나 사이의 끊어진 줄을 잇는 일.

질문 되살리기: “왜 이걸 하지?”, “이대로 괜찮을까?”, “지금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는가?” 답이 없어도 질문을 포기하지 말라. 질문이 방향을 만든다.

타인의 삶을 조용히 바라보기: 누군가의 글·노래·그림 속에서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를 발견하라. 의존이 아니라 고요한 목격으로.

루틴 재구성: 아침 핸드폰 대신 종이 노트한 줄, 매주 같은 시간의 혼자 산책, ‘해야 할 일’과 무관한 순수한 나의 활동 하나. 작은 선택이 쌓여 ‘내가 사는 삶’을 만든다.

포기하지 않기: 오늘을 버리지 않는 것, 내일을 미워하지 않는 것, 지금의 나를 포기하지 않는 것. 불완전하고 작아도 진짜 내 삶이라면 충분하다.


17장. 포기와 회피, 그리고 하루하루 다른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포기하지 마.” “도망치지 마.” “직면해.”

나는 되묻는다. 정말 포기는 도망일까?

포기의 두 얼굴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놓아 버리는 절망의 포기

이 싸움이 더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고 멈추는 인식의 포기

모든 포기가 도망은 아니다. 어떤 포기는 용기의 다른 얼굴이다.

회피는 항상 나쁜가

상처가 덜 아물었는데 억지로 들여다보면 고통은 깊어진다. 때로는 돌아서야 하고, 때로는 피해야 한다. 살아남는 것—그것이 철학 이전의 조건이다.

사르트르와 ‘나쁜 믿음’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선택은 자유이자 책임의 형벌. 이 책임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우리는 말한다. “어쩔 수 없었어.”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이게 운명이야.”

사르트르는 이것을 나쁜 믿음이라 불렀다—스스로의 자유를 거짓으로 포기하는 태도. 진짜 포기는 자유로부터 도망치는 것이다.

도망치지 않으려면

상황을 선택 가능한 것으로 다시 인식하라. 실패해도 좋다—그 또한 내가 내 삶을 만든 증거다. 포기·회피의 결정이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기준과 솔직한 감정에서 나왔다면,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책임 있는 자유다.

나의 포기는 무엇이었나

나는 어떤 것들을 포기했다—관계, 꿈, 습관, 사람. 어떤 포기는 도망이었고, 어떤 포기는 재구성을 위한 필요였다. 그 구분은 오직 나만이 안다. 그 선택으로 내가 조금이라도 더 나답게 살게 되었다면,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존재를 향한 진실한 방향이었다.

하루하루 다른 세상

어제는 견딜 만했지만 오늘은 벽에 부딪힌다. 어제는 웃었지만 오늘은 눈물조차 나지 않는다.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하루하루 다른 세상을 산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또 변했어?” 그러나 감정은 흐르고, 생각은 뒤집히고, 의지는 흔들린다. 그것은 일관성의 실패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다. 세상도 매일 다르다—공기의 무게, 표정의 결, 반응의 온도가 달라진다. 삶은 정지된 풍경이 아니라 매일 다시 태어나는 사건이다.

나를 오해하지 말자. 어제 긍정하고 오늘 부정해도, 어제 사랑하고 오늘 멀어져도, 그 모든 감정은 진짜였다. 나는 매일 다른 세상을 통과하고 있을 뿐이다. 삶은 직선이 아니라 진폭이다. 불안·희망·흔들림·멈춤—그 모든 파동이 하나의 ‘나’를 만든다.

키르케고르는 말했다. “절망은 자기 자신이 되려 하지 않거나, 되기를 두려워하는 상태다.”

나는 하루하루 다른 나로 살아가되, 그 하루들이 쌓여 ‘나’가 됨을 받아들인다. 오늘이 다르면, 내일도 다를 것이다. 어떤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고, 어떤 날은 시작하고 싶다. 어떤 날은 나를 이해할 수 없고, 어떤 날은 나를 안아주고 싶다.

나는 그런 하루하루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그저 오늘을 살고, 내일의 나를 미리 판단하지 않는다.

내가 매일 다르듯, 세상도 매일 나를 다르게 받아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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