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

by 자강



아직 경성 가신 큰 형님께서 돌아오시지 않았는데 읍내 면서기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집마다 청장년 중 한 사람은 징용이나 징병으로 차출된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막 소학교를 졸업한 나이어서 다행히 차출될 일이 없지만 나보다 네 살 위인 다섯째 막내 형님은 그 조건이 얼추 맞아떨어지는 18살이었다. 어머니는 친정 쪽 어르신들과 큰형수의 집안 어른들을 총동원해서라도 막내 형님의 징병이나 징용을 막으려 하셨지만 전쟁 미치광이가 돼버린 일본 놈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인지 우리 집은 만주 전쟁 중에 큰 형님이 전사하신 이력이 있는 집이어서 그런지 막내 형님은 일본 놈들이 중일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지만 징병 대신 징용을 가는 거로 결정이 되었다. 어머니와 큰형수는 일본으로 징용을 가는 막내 형님을 위해 옷가지를 손수 여러 벌 바느질해 만들어 준비해 주셨고, 그런 호사를 누린다며 막내 형님은 짐짓 태연한 척 기뻐했다.

"형님, 겁 안 나는 겨?"

"까짓것 일본 놈들이라고 별거 있겄냐? 낸 힘쓰는 건 모든지 자신 있으니께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와 그 돈으로 논을 살껴. 천석지기 만석지기가 될 거구먼. 그때 가서 니 내한테 빌붙을 생각 허들 말고 허던 공부나 열심히 하고 있어."

"왜놈 말도 모르면서 괜찮겠어. 뭐 일을 입으로 헌다냐? 괜찮혀. 걱정 말어."

막내 형님은 호기 있게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내심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낮부터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밤부터 추적추적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렸고 처마 밑으로 빗물이 뚝뚝 떨어지는 밤이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우리 동네에서 징용이나 징병에 차출될 젊은이들이 동네 서낭당 나무가 있는 공터에 모였다. 동네 무당이 단체로 굿을 해준다는 것이었다. 모두들 무사귀환을 바라는 맘에서 하는 거라지만 난 저런 미신을 믿는 것이 못마땅했다. 마을 사람들은 정말 귀신이 있다고 믿나 보다. 난 아버지와 큰 형님의 연이은 죽음에 신은 없다고 믿게 되었다. 내가 믿는 신이 있다면 그건 우리에게 재앙만 주는 나쁜 신만 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는 우리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모든 일들이 이리도 잔혹하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무당은 천지신명부터 시작해 우리 어머니께서 평소 찾는 모든 신들을 소환해 발원 축문을 읽어 내려간다. 방울을 흔들어대고 버선발로 통통 뛰며 한 사람 한 사람 몸을 부채와 돼지피를 무친 나무로 연신 쓸어내린다. 피 냄새가 역하게 퍼져서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고 코를 막았다. 어머니와 큰형수는 손이 닳아 없어질 지경으로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비벼대며 중얼거린다. 다른 집의 누군가의 어머니나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저 뜨거운 기운이 실제 효험이 있다면 모두들 징용이나 징병을 가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바람이었고 그 부산했던 굿이 끝나고 다음날 새벽같이 기차를 타고 그들은 떠나갔다. 난 어린 조카들을 돌보고 있었기에 어머니와 큰형수만이 새벽이슬을 맞고 막내 형님을 기차역까지 배웅하고 돌아오셨다. 그날 하루 동안 어머니는 곡기를 끊으시고 하루 종일 안채에서 나오지 않으셨다. 나 역시 샛별이 뜨는 시각까지 잠을 못 들다 닭이 우는소리를 듣고 겨우 잠이 들었다.

막내 형님의 고단한 징용 생활은 해방이 되던 해에 끝이 났고, 일본에서 청춘을 다 바친 형님은 돈을 벌기는커녕 몸만 축난 채로 병들어 귀향했다. 막내 형님은 큰 형님을 제외한 형제 중에서 기골이 가장 큰 편이어서 동네 씨름깨나 하는 청년들 사이에서도 으뜸이었고 힘이 좋아 농사일도 수월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형님이 징용에서 돌아왔을 땐 피골이 상접하고 푹 패인 두 볼에 툭 튀어나온 광대뼈 때문에 죽은 지 삼 년은 더 된 몽달귀신같아 보였다.

형님의 징용 가는 길 이야기는 참 고단했다. 형님이 탄 기차는 목포까지 가기 위해 두어 번 갈아타는 번거로움이 이어졌고 목포에 이르러서는 목포 제일의 부자가 운행하는 배를 타고 일본까지 가야 했다고 한다. 목포 제일 부자라는 이는 그런 큰 배를 여러 척 소유한 선주였고, 엄청난 크기의 논밭도 소유한 대지주였다고 한다. 그 대지주이자 선주인 부자는 우리 조선인을 배로 일본에 실어다 주는 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겼고, 일본 놈들이 원하는 일을 척척 해결해 주는 일본 앞잡이를 하는 놈이었다. 나는 아버지께서 살아계셨다면 곰방대로 등짝을 후려쳤을 텐데 아버지가 안 계시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막내 형님이 징용으로 끌려가신 곳은 넷째 형님처럼 광산 일을 하는 곳이었다고 한다. 형님이 광산일 중 가장 힘든 것 중에 하나는 혼도시를 입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이 우리 조선보다 남쪽이기도 하고 탄광 안이 열기가 뜨거워 날마다 혼도시만 입고 작업을 했다고 한다. 일이 끝나면 주어지는 밥은 소금만 넣은 주먹밥이 전부였고, 그것마저 넉넉하지 못해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열악한 환경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그리운 고향에 대한 향수 때문에 형님은 탈출을 여러 번 강행했다. 그때마다 형님은 일본인들에게 들키지 않고 다시 탄광으로 돌아가기를 여러 차례 반복한다. 그러한 탈출 시도가 번번이 가로막히고 들통이나 다시 일본으로 잡혀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같은 노무자였던 일본인의 고발도 아니고, 감독관도 아닌 우리 조선인 때문이었다고 형님은 회상했다. 탄광에서 노역을 한 지 서 너 달 때쯤 되자 형님은 탄광으로 조선인을 태우고 들어오는 배 시간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탄광에서 작업 중 다이너마이트 폭발로 부상자가 생기고, 바윗덩어리에 깔려 죽거나 더 많은 석탄을 캐려고 버팀목을 떼어내 탄광이 무너지는 사고로 죽는 이들이 속출했다. 게다가 사고로 죽은 이들의 시신조차 그 행방을 알 수 없어 조선인들의 공포는 더 심해졌고, 형님은 또다시 탈출을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조선인들을 태운 배가 저녁나절에 도착하면 다음날 아침 일찍 조선에 돌아가므로 들키지 않고 배에 몰래 타기만 한다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에 이른 형님은 달이 뜨지 않는 그믐에 밀항을 단행했다.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홀로 배에 탄 형님은 목포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문제는 목포에 도착 후 선원들에게 발각이 되었고, 사실을 알게 된 선주는 형님을 다시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고 만다. 그 일로 갖은 고문과 매질을 당한 후 형님은 더 이상 탈출을 시도하지 않았다. 도항을 할 수 없는 내륙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형님을 일본에 다시 보낸 선주는 광복 후 건국 위원회 같은 단체에서 주요 자리를 차지했고, 그의 아들은 훗날 국회의원이 되었다. 형님은 국회의원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때마다 욕을 하시곤 했다. 친일을 일삼던 놈들을 제대로 척결하지 않는 정치권을 비판했고 그 후로 정치질하는 놈들과는 술자리도 함께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막내 형님의 마음을 헤아려 광복 이후에 정치판에 뛰어든 친구들을 더 이상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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