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내려가신 넷째 형님으로부터 기다리던 편지가 왔다. 앓고 있던 병은 잘 치료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집안사람들이 모두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고 군 복무 조심히 잘하라는 안부말이 전부였다. 나는 그리도 궁금해하는 셋째 큰 형수의 이야기가 없어서 답답함이 컸다. 집안사람들이 모두 잘 지냈다는 말에는 큰 형수도 잘 지내고 있다는 말이라고 여기고 왠지 모를 불안함을 스스로 달래 보지만 좀처럼 불길한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큰 형수가 새색시가 되어 우리 집에서 지내고 여섯 달이 흐른 뒤 셋째 큰 형님은 서울에서 함께 공부한 친구와 함께 만주행을 결심했다. 일제의 수탈이 심해져 간도로 떠나는 이들이 많아지고, 더 잦아진 징용이나 징병으로 나라 상황도 어수선한데 만주에 간다니 어머니의 한숨은 더 깊어지셨고 큰 형수는 말할 수 없는 큰 슬픔에 빠져든 것 같았다. 북간도 지역에서는 독립군의 항일 운동 이후 일제의 대대적 독립군 토벌이 벌어졌었다는 소식이 이곳까지 들린 지가 벌써 오래되었다. 그런 살벌한 상황을 인지하신 어머님의 반대가 크셨지만 완고한 큰 형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형, 큰 형님이 만주 가부리면 형수는 어찌 되는 거여?"
"어찌 되긴 뭘 어찌 돼. 기냥 지둘러야지. 별수 있남. 우리 집에서 셋째 형님 이길 사람 있간디?"
" 그럼 형수님은 우째 산다는 거여? 친정으로 도망가면 어쩌냐고?"
"엄니가 계신디 그러겄냐. 니는 공부나 열심히 허여.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지 말고 알았제."
다섯째 형님은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연신 새끼줄을 꼬고 있다. 나는 큰 형수의 사슴 같은 그 큰 눈망울에서 뚝뚝 떨어질 눈물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형님은 만주행을 선언하고 열흘 뒤 진짜 가버렸다. 집안사람 이외에 아무도 형님의 부재에 눈치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는지 만주가 멀어서 그랬는지 형님은 새벽같이 서둘러 집을 나섰다.
만주로 떠난 큰 형님이 집을 비운 일 이외 별다른 큰일이 없던 우리 집은 어머니와 큰 형수께서 식솔들을 먹이고 보살피느라 연일 고생을 하셨다. 당장에 내가 다니는 소학교에 내야 하는 월사금부터 큰 부담이었다. 다섯째 형은 일찌감치 농사일 배운다고 학교 다니는 것을 포기했기에 나 홀로 학교를 다녔다. 나는 날마다 몸에도 불편한 교복을 입고 그 어려운 왜놈 말로 공부하는 학교가 정말 싫었다. 그래서 수업 시간에 늘 딴짓을 하던 나를 선생님은 늘 혼을 냈고 벌을 주기 일쑤였다.
그런 던 어느 날 수신(修身) 과목을 배우던 수업 시간에 나는 딱지를 만들고 있었다. 왜놈 말을 알아듣지도 못했고, 재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딱지에 그림도 그려 넣었는데 우리나라를 그리고 그 위에서 일본을 향해 군인이 총울 쏘는 장면도 그려 넣었다. 그림으로라도 이렇게 일본을 혼내주는 게 속이 시원했다. 나는 신이 나서 총에서 뿜는 불꽃 그리기에 열중하다 갑자기 내 머리 위에 뭔가 쏘아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선생이 진작부터 내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산 아나타 나이 시나이노?"
나는 일본 말로 선생이 뭐라 하는데 전혀 못 알아 들었다. 내가 그린 그림을 들고 교무실로 따라오라는 손짓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일로 선생에게 매를 맞았고 어머니를 대신해 큰 형수가 선생에게 연신 사죄하는 말을 해야 했다. 이 일이 있은 후 난 학교가 더 싫어졌고, 어른들 몰래 학교를 가지 않은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나의 이런 일탈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다섯째 형님에게 들켜버렸기 때문이다. 난 그 일로 큰 형수에게 큰 형님이 오실 때까지 사고 치지 않고 학교를 잘 다니기로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2년이나 지켜야 했다. 만주를 가셨던 큰 형님이 돌아오시는데 2년의 시간이 흘렀기 때문이다.
2년 만에 돌아오신 큰 형님은 어린 내 눈에도 몰라보게 달라지셔 오셨다. 큰 키는 여전하셨지만 볼이 패인 얼굴에 내가 매달려도 끄떡없어 보였던 어깨와 등이 잔뜩 움츠리고 있는 수숫대같이 보이기까지 했다. 어머니는 그런 큰 형님을 버선발로 맞이하셨고 큰 형수는 말로 다 못할 서러움이 솟구치셨는지 형님을 똑바로 쳐다보질 못한 채 안채로 가시는 것이었다. 2년 만에 돌아오신 큰 형님 소식이 퍼지자 집안 어른들께서 다음날부터 우리 집에 오셨고 그간 만주에서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시느라 사랑방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막내 형님 말로는 만주로 떠났던 조선 사람들이 되놈들의 텃새로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와 독립군들이 북간도에서 일본군에 쫓기어 러시아로 흘러가고, 또 그곳에서도 무슨 사달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큰 형님의 사랑방에서의 만주 이야기를 나누는 일과가 계속되기가 열흘이 흘렀고 그제야 나는 여유가 생기신 큰 형님과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날도 보름달이 떠서 앞마당에 나무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날이었다.
" 네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 나도 들었다. 그리 학교가 싫더냐?"
"공부가 싫은 것은 아닌디요. 자꾸 왜놈 말로만 공부하니께 도통 알아듣지도 못하겠꼬 그냥 싫어유."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은 그렇게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는 허지 않고 피해버려서 그런 것이다. 일본에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으려면 그렇게 하기 싫은 것도 배우고 열심히 실력을 키워서 그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战百胜)이라 했다. 그러니 너도 왜인 말을 배우기 싫다고 무조건 멀리할 것이 아니라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거라.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다면 그리 말씀하셨을 게야. 알겠니, "
나는 큰 형님과의 달밤에 나눈 이야기 이후에 학교를 열심히 다녔고 왜놈 말도 열심히 배워 다섯째 형님에게 가르쳐 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소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쳤고, 졸업을 하던 날 큰 형수는 나의 첫 생질을 낳으셨다. 큰 형수를 꼭 닮은 눈이 큰 사내아이였다. 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하면서 나를 삼촌보다는 형처럼 늘 따라다니는 아이가 되었다. 큰 형님이 바쁘신 이유로 집을 자주 비우셨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 후로 큰 형수는 큰 생질보다 네 살 어린 작은 아이를 또 낳았다. 그 아이도 사내아이였다. 어머니께서도 연거푸 사내아이를 낳은 큰 형수를 믿음직스러워하셨고 큰 형님은 집을 비우는 일이 더 잦아지셨다. 그러는 사이 우리 집에도 올 것이 왔다. 집마다 한 명씩 징용이나 징병에 보낼 사내를 착출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