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공포의 대기실

by Rinah

서류 통과 후 정해진 면접시간에 맞춰 면접장소인 승무원 학원에 찾아갔다. (이땐 승무원 '학원'이 있다는 것도 새삼 신기했다.)


로비에는 면접 보러 온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는데, 우리나라에 예쁘고 멋진 사람들 진짜 많구나라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정장에 풀 메이크업 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있는걸 처음 봤던 나로서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서류 통과자가 3,000여 명이었다고 했는데, 그 인원들을 나눠서 부르긴 했겠지만 내가 갔던 날에도 최소 몇백 명이 왔었을 테니 사람이 바글바글하다고 느낀 게 마냥 착각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 구경하느라 면접장이라는 긴장감도 잠시 깜빡하고 있던 차에, 곧 그룹 면접이 시작되니 정숙하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내 번호가 속한 조는 앞 조는 아니어서 대기시간이 한 시간쯤 있었다.


그런데 앞에 면접 본 그룹들이 면접장에서 나올 때마다 수십 명씩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게 아닌가.


처음엔 건물 외부에 다음 면접장으로 가는 길이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그 많은 인원이 벌써 탈락해서 집에 가는 거였다.


저 많은 사람들이 벌써 끝이라고?

면접장 들어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대기자들이 모여있는 곳이 걱정 어린 목소리들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숙하라는 안내방송이 여러 차례 다시 나왔지만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계속 커졌다.


1차 면접을 본 사람들 중에 지인이 있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연락해서 어떤 면접이었는지 물었는데, 난 지인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있던 다른 지원자 분들이 공유해줘서 자연스럽게 면접 방식을 알게 되었다.


10명에서 15명쯤 한 조로 들어가고

받는 질문은 공통질문 딱 하나.

간단하게 영어로 자기소개 하는 거라고 했다.


문제는, 자기가 준비해 온 소개를 하는 게 아니라 면접관들이 제시하는 키워드에 맞춰서 소개해야 한다는 거였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자기 자신을 만화 캐릭터에 비유해서 간단히 소개해보세요.

자기 자신을 음식에 비유해서 간단히 소개해보세요.

자기 자신을 계절에 비유해서 간단히 소개해보세요.

자기 자신을 동물에 비유해서 간단히 소개해보세요.

자기 자신을 물건에 비유해서 간단히 소개해보세요.

자기 자신을 색상에 비유해서 간단히 소개해보세요.


이게 무슨... 뭐야 이게?


탈락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 대기 중인 지인들에게 하는 말들이 들렸다.


"키워드로 뭐가 나올지 알 수가 없어."

"앞 조랑 키워드가 겹치지도 않아."

"거의 다 떨어지고 한 조에 한 명 붙을까 말까 해."

"우리 조 15명 들어갔는데 다 떨어졌어."


너무 허무하다고 울먹이면서 면접장을 떠나는 지원자들도 여럿 보였다.


백번 이해되는 심정이었다. 저런 질문들이 면접에 나올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해 본 사람이 몇이나 있겠나.


대기실은 당혹스러움이나 약간의 긴장감을 넘어 순간 거의 공포감에 휩싸였다.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탈락자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앞 조에서 받았다는 키워드들로 열심히 답변연습 하며 다음 키워드로 나올만한 게 뭐가 있을지 예측해 보는 사람들로 대기실은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내가 저런 질문받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까.


대기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앞에서 나왔다는 질문들을 다시 하나씩 생각해 보는데, 문득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띄었다.


키워드가 뭐든 간에 간단히 소개하라고 한 모양이네.


그 이후에 나오는 다른 조 후기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ㅇㅇ에 비유해서 간단히 자기소개해 보라는 틀은 안 바뀌고, 키워드만 계속 바뀌고 있었다. (그 많은 조들에 제시하는 키워드가 안 겹치는 게 정말 신기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키워드보다는 간단히 말하는 게 핵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워드가 진짜 중요한 거라면 키워드가 안 바뀌겠지. 그런데 지금 계속 바뀌잖아. 진짜 중요한 건 간단히 답하라는 거고, 간단히 하라는 건 진짜 소개를 듣겠다는 게 아닐 테니까, 정말 짧게만 답하면 되지 않을까.


지금 면접관들이 지시하는 건 두 개.

ㅇㅇ에 비유해라, 자기소개해라.


질문받자마자

ㅇㅇ에 비유하는 한 줄

왜냐하면 나는 어떤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 줄

이렇게 답변 끝내야 한다.


한 줄 자기소개 간단히 뭐라고 할까. 승무원들 글 보니까 승무원은 항상 팀으로 일한다고 했어. 그럼 누구 하고나 잘 어울려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자. 키워드로 뭐가 나오든 이렇게 말하자. 한 명씩 팩트 체크할 시간도 없어 보이니까 대충 좋은 말 하지 뭐.


키워드는... 뭐가 나올지 어차피 예측 못한다고 했으니까, 듣는 순간 생각나는 첫 단어 아무거나 말하자. 고민해 봤자 소용없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연관성을 어필하는게 아니라 말 끊기지 않게 대답하는게 중요한 거 같으니까.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게 맞는 전략인데 그 순간에는 나름 베팅하는 심정으로 크게 용기를 내야 했다.


첫 면접, 첫 질문에

그나마 답변 준비한 게 자기소개인데

그거 다 포기하고

순발력으로 임기응변하겠다고?

사진값 까먹었냐

미쳤어?


순간 속으로 별별 생각이 스쳤지만, 수백명의 지원자들로 북적거리는 대기실, 그리고 예측불가능한 키워드에 간단히 소개하라는 지시사항이 유지되는 걸 보고, 준비해 온 정석 답변으로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의 나 자신에게 알아서 파이팅 하라고 대충 생각 정리를 마치고 앞에 조들이 면접장에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20분쯤 더 지켜보았을까. 내 번호가 속한 조가 호명되었고 번호 순서대로 면접장 문 앞에 서서 대기하라는 방송이 나왔다.


난 내가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면접장 문 앞에 서니까 어찌나 떨리던지.


한겨울 칼바람 맞으며 한파에 덜덜 떠는 것 마냥 아무리 주먹을 세게 쥐어도 양손은 계속 부들거리고,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이가 계속 부딪쳐서 드드드드 소리가 날 정도였다.


이게 뭐라고.

이게 뭐라고!


주먹 쥐느라 벌겋게 남은 손톱자국들을 없애보겠다고 양 손바닥을 비비며 심호흡한 뒤 앞뒤로 서있던 다른 지원자들과 잘해봅시다 파이팅 파이팅 작게 외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속한 조 번호가 호명되고 면접장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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