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지 않은 높은 구두에, 자빠지지나 말자고 생각하며 온몸에 힘을 주고 걸어 들어갔다.
방 안에는 면접관 네 분이 앉아 있었고, 나를 포함한 지원자 열다섯 명이 그들 앞에 약 2미터 간격을 두고 일렬로 섰다.
대충 곁눈질로 보아하니 다들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서길래 나도 그러고 서있었다.
그 순간에도 '아, 차렷 자세가 아니구나. 이렇게... 오케이.' 곁눈질하며 이렇게 생각하고 자세 고치고 있었으니 난 정말 승무원 면접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면접장에 들어간 것이다.
면접관분들도 지원자들도 다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게 웃는 게 아니었다.
난생처음 보는 분위기에 차라리 빨리 면접이나 시작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면접관 중 한 분이 입을 열었다.
"다들 고생 많습니다. 지원자가 워낙 많아서 한 명씩 자세히 이야기 들을 수 없다는 점 미리 양해 부탁해요. 어떻게 하는지는 이미 밖에서 들어서 알고 있죠? 이 조는, 본인을 꽃에 비유해서 영어로 간단히 자기 소개해보세요. 순서대로 한 분씩 앞으로 한걸음 나와서 소개하고 다시 들어가면 됩니다. 자, 저쪽 끝분부터 시작하죠."
어우
나를 꽃에다가요?
오글오글
민망함에 피식 웃을뻔한걸 미소로 참고, 대기실에서 생각했던 내용을 다시 떠올렸다.
키워드 듣고 처음 떠오르는 거 말하기. 그리고 키워드가 뭐든 간에 난 아무하고나 잘 어울려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
그런데 사람들 생각하는 거 똑같은 게, 그런 긴장감 속에서 영어로 꽃 얘기해 보라고 하면 일단 떠오르는 게 장미다.
아니나 다를까 내 순서가 오기도 전에 이미 면접장은 장미밭이었다.
같은 꽃 얘기하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는데도 어쩐지 장미를 또 말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계속 장미를 들어서 그런가 문득 떠오른 꽃이 안개꽃이었다.
장미 옆에 있는 안개꽃.
화려하진 않아도 어디나 어울리는 꽃.
어, 좋은데?
좋았어.
근데 안개꽃이 영어로 뭐였지.
.....
뭐지?!
난 당시 15명 중 8번째로, 거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안개꽃이 영어로 뭐였더라 이 생각만 하느라 6번째, 7번째 분들은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대기실에서는 키워드가 중요한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해 놓고 막상 면접장에선 누구보다 키워드에 꽂혀버렸다.
어느새 내 왼쪽에 서있던 7번째 분이 뒤로 걸어서 내 옆으로 돌아오고, 면접관 네 분이 모두 나를 응시했다.
아, 내 차례네.
몰라몰라. 쫄지말고.
"안녕하십니ㄲ...."
"어어?"
"하핫!"
뭐지.
왜 그러세요.
갑자기 면접관 네 분이 모두 웃기 시작했다.
???
뭐지?
나 뭐 묻었나?
"뒤로 가주세요. 뒤로."
네?
헉
한걸음만 나와서 소개하고 뒤로 들어가라고 했는데, 내가 무려 세 걸음이나 걸어서 면접관분들 책상 바로 앞에 서있었다.
안녕(뚜벅)하십(뚜벅)니까(뚜벅) 이러고 면접관들 바로 앞까지 가서 미소 지으며 눈을 부릅뜨고 그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 소개를 들려주마.휴먼.도 아니고.
"얽?! 죄송합니다!!“
"아니, 다 들어가지는 말고 한 걸음은 나와야지요."
"어!? 또 죄송합니다!“
"하하하하!!"
이젠 면접장에 같이 있던 다른 지원자들도 모두 빵터져서 웃기 시작했다.
다들 계속 웃고 있어서 민망해죽겠는데 그래도 하라고 한 건 해야하니까.
"난데없이 문워크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저는 제가 그 장미꽃 옆에 있는 작은 하얀 꽃들 있죠? 영어로 지금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데, 한국어로 ahn-gae-ggot! 저는 제가 그 꽃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 꽃이 어느 꽃 하고나 어울리는 것처럼, 저도 누구하고나 어울려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영어 면접이라서 영어로 얘기한 것이다.
그 와중에 대기실에서 미리 생각했던 포맷대로 답을 하긴 했으니 난 그래도 할 거 다 했다 생각하고 앞을 보니,
면접관 분들은 아직도 웃고 계시고 그중 한 분은 하도 웃어서 거의 울고 계셨다.
음....
그때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X된 거로는 내가 세계 1등이라고.
지구 빨리 멸망 안 하냐.
할 거면 지금이다 이 마더 네이처야.
어느새 다른 지원자들도 자기소개를 마치고, 대기실로 이동해서 결과 기다리라고 안내를 받으며 다 같이 면접장을 빠져나왔다.
대기하는 동안, 같은 조에 있던 분들이 그래도 덕분에 다들 많이 웃어서 면접장 분위기 너무 좋았다며,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나를 토닥여줬다.
전 이미 영혼 로그아웃 했습니다 여러분.
저 혼자 있게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민망함과 해탈을 오가며 위로를 받고 있는데 학원 측 직원 한 분이 지원자들이 모여있던 대기실에 들어왔다.
+
안개꽃은 영어로 Baby's Breath다.
아기의 숨결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참 몽글몽글 귀여운 이름이지만
내 기억엔 몽글몽글은 개뿔. 그저 들숨날숨이다.
+
여전히 안개꽃 좋아하긴 한다.
안개꽃은 죄가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