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 없는 땅에 지도를 그리다
자, 이제 덩굴을 벗어낸 나무들이
어찌 고운지 보라.
한여름 백일동안 꽃을 피우는
백일홍, 그 배롱나무.
흰 눈이 내리면
나무에서 한번
땅에서 한번 더 피어나는 동백나무.
오랜 시간 정원에 붉은 열매로 색을 더해주는
먼나무까지.
저마다 가지각색으로
고운 자태를 자랑하는 식물이 참 다양하다.
굳이 꽃이 피지 않아도,
열매가 맺지 않아도,
모든 나무는 저마다 이유로 아름답다.
수줍은 듯 조금씩 물드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
수형도, 키도, 모양도 가지각색이지만
어떤 나무든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길도 없고
다져진 땅하나 없는 이곳에,
마음속으로
작은 지도를 그려나간다.
따뜻한 봄날엔
수선화가 피는 길,
그 너머엔
작은 카페가 있고,
그 앞에는
한 그루의 꽃나무가 선다.
더운 여름엔
시원한 그늘 아래 화려한 꽃이 피고,
하얀 겨울날에도
어딘가 모자람 없이 단정한 공간이 된다.
그 모든 상상 속에
계절이 흐르고,
바람이 지난다.
정작 가야 할 곳을 모를 땐,
그저 가만히 앉아 생각을 다듬는다.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있고,
정리가 되어도
발이 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상상
이라도 하며 길을 거닌다.
어쩌면 그 길은
아직 내 안에만 있고,
그 길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간혹 이런 생각도 든다.
사랑
사랑에는 참으로 큰 힘이 담겨 있어서,
사랑에 빠지면 꿈이 생긴다.
그 사람의 꿈까지도
이루어 주고 싶은 마음.
어쩌면 우리가
각자의 길을 아직 알지 못하는 건,
사랑의 고귀한 힘이
필요한 시간이라서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에서 그리던 길이
점점 선명해질수록,
그 곳을 향한 마음이
조금씩 옮겨간다.
흙냄새가 나는 곳,
햇살이 머무는 자리,
나무 그림자가
천천히 길게 드리워지는 곳.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 정원이,
어쩌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언젠가 그 길을 따라가면,
내가 찾던 세상이
그 끝에 있을지도 모른다.
완성되지 않은 청사진이더라도
실행하다 보면
어느새 구색이 갖추어지는 법이다.
적어도
'어울리지 않는 나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저마다 사람 사는 동네가 다르듯,
나무들도
터를 가려 자란다.
결국 중요한 것은
'환경'이다.
양지바른 곳에 있어야만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고,
햇빛을 보면 녹아버리는 식물도 있다.
배수가 되지 않으면 뿌리가
썩어버리는 나무도 수두룩하다.
누구나 자신의 꿈이
언제나 잘될 거라고 믿지만,
모든 것이
어디서나 잘 풀리지는 않는다.
물고기는 바다에 살고,
새는 하늘을 나는 법이니까.
이쯤이면 제법
정원의 청사진을 그린 셈이지만
목표와 환경이 전부는 아니다.
배롱나무는
적절한 조건 아래에서
수고가 스무 척 정도 자라나는 나무다.
아직 어린 나무를 심는다면,
내가 상상한 정원이 완성되기까지는
적어도 다섯 해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시기와 때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맞는 시기와 때가 있고,
우리가 임의로 할 수 없는 경우도
정말 많다.
탄생과 죽음,
돈과 명예를 얻는 시기와 때를
믿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식물을 키울 때만큼은
분명히 알 수 있다.
씨앗을 심고 수확하는 시기,
그에 맞는 이식 시기가 있다.
특히 알뿌리 식물이라고도 부르는
구근 식물은
봄에 심어야 하는 춘식 구근과,
가을에 심어야 하는 추식구근이 있다.
가을에 심은 구근은
겨울의 찬바람을 맞아야,
이듬해 봄
어느 때보다 예쁘게 피어난다.
이처럼 식물에는
반드시 파종해야 하는 시기와,
수확해야 하는 때가 담겨 있다.
올해에 다가오는 겨울이
누군가에겐 가장 추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독한 겨울이 계속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겨울을 견디는 방법을
알려줄 수는 없지만,
반드시 봄이 오리라.
어느 때보다 추운 날들을 견뎌낸
수선화의 뿌리는,
이듬해 봄에
가장 예쁘게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