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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지수 오류

by 김봄빛




그때만 해도 젊었었나 보다. 제법 향기 나는 꽃이기도 했나 보다. 내 나이 마흔을 막 넘겼던 어느 봄날로 기억한다. Drug store(드러그 스토어)에 볼 일이 있어 가게 문을 들어서는데 가게에서 나오던 내 또래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내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옷 색깔이 정말 예쁘군요.”

미국인들은 처음 보는 외간 여자에게 예사로 그런 식의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그맘때 봄만 되면 항상 꺼내입던 무릎을 살짝 가리는 길이의 진분홍빛 봄 코트가 있었는데 그걸 입은 날엔 예외 없이 옷 색깔이 예쁘다는 찬사를 듣곤 하였다.

“감사합니다.”

“한국 사람이죠?”

“네. 그렇습니다만...”

“동생의 아내가 한국인이라서 한국인의 외모를 좀 잘 알아봅니다.”

“아, 네~. 그렇군요. 안녕히 가세요.”

“잠깐만요, 혹시 전화번호 좀 알 수 있을까요?”

“네?”

잠시 당황했다.

“저는 유부녀입니다.”

“손가락에 결혼반지가 없는데요?”


나는 결혼반지를 잘 끼지 않았다. 반지의 보석이 위로 튀어 올라와서 내 옷을 긁기도 하고 남의 가방에 스쳐 가죽에 흠집을 내기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혼할 때보다 굵어진 손가락 때문에 반지가 들어가지도 않았다. 알 없는 반지를 끼더라도 상대적으로 손가락이 조금 더 가는 오른쪽 손가락에만 끼었으니, 미국인의 시각으로 볼 때 왼손에 반지가 없는 나는 유부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낯선 남자가 내 손가락에 결혼반지가 있느니 없느니를 운운하리란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다.

그런데 이 느낌은 뭘까? 내가 헤퍼 보이나 싶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의 외모 또한 내 타입은 아니었다. 외모를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건 좀 거시기한 일이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건 외모이니 어쩌랴, 나도 사람인 걸. 그 사람의 외모가 좋고 나쁨을 떠나, 제 눈에 안경이라고 내 눈에 안 맞았다는 말이다. 만약 그가 내 눈에 매력적인 ‘마크 하먼’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다면 내 맘은 달라졌을까? 유부녀의 신분으로 어차피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러나 적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보는 눈은 있어 가지고’라며 흐뭇해했을지도 모른다. 문득문득 멋진 이성이 내게 걸어온 수작(?)을 곱씹으며 혼자서 히죽거릴 수도 있었을 게다.


대책 없이 웃긴 내 마음이 낯설기 그지없다. 내 마음이야 어쨌건 벌이 꽃을 찾는 건 대자연의 섭리이다. 옆에서 남편이 뒤척인다. 예전엔 그도 ‘한 몸매 하는’ 벌이었다. 지금은 배가 나와 앞태는 영 아니올시다지만 아직도 가끔 그의 뒤태에 반하기도 한다. 60이 다 된 나이에 뒤태나마 가끔 반할 수 있는 남편이 있으니 그것도 복이지 싶다. ‘이따금 벌어지는 번지수 오류는 삶의 재미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면 남편이 싫어할까?




*마크 하먼: 미국 드라마 ‘NCIS’에서 요원 ‘깁스’ 역으로 출현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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