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게 하는 힘

나는 응원이 필요해

by 기글지니

기나긴 추석 연휴가 끝나고, 다시 조깅을 해보기로 결심한 후 처음으로 나서는 아침운동이다.

제법 쌀쌀해진 날씨를 대비해 바람막이를 걸쳐 입고, 왜 이렇게 모자가 안 어울리는 거야 투덜거리며, 마라톤 풀코스라도 완주할 수 있을 거 마냥 호기롭게 문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예보에도 없던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갑자기 차가워진 아침 공기에 미스트 같은 물방울이 살갗에 닿으니 왠지 오늘은 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고, 이대로 집으로 기어들어가 나의 의지박약을 탓하며 쭈그러들고 싶지도 않았다.

금방 그치겠지 주문을 외우며, 맑은 날의 걸음걸이로 익숙한 길을 걸어갔다.




내가 사는 곳은 도시와 농촌의 풍경이 공존하는 곳이다.

도농도시(都農都市)

초등학교 때인가 중학교 때인가 사회 수업 시간에 배운 용어인데, 정말 딱 용어만큼의 느낌이 나는 풍경이다.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도시의 모습을, 저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농촌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어찌 보면 도시와 농촌의 장점을 모두 갖춘 것처럼도 보이고, 달리 보면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도 같다.

왠지 내 모습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탁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영 못쓰겠지도 않은... 그래서 뭔가 특별할 것도 없고 관심도 끌 수 없는 어정쩡한 상태. 자의식 과잉의 시대에 나 같은 사람은 참 살기가 힘들다.




비가 오는데도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5분 정도 비를 맞으며 걸어왔더니 운동을 갈까 말까 하는 갈등이 말끔히 씻겨졌다. 비 속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니 더더욱 그래졌다. 이젠 그냥 목적지까지 갔다 오는 일만 남은 것이다.

하천 옆 농로를 따라 편도 2km 지점에 있는 다리를 반환점으로,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 반대편 길을 따라 원래 지점까지 돌아오는 코스이다.

어느새 길 가장자리에는 가을꽃들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빗길에 나왔다가 꽃길을 달렸다.

조금은 간지러운 감상을 보태면, 길가의 꽃들이 잘 나왔다며 격려해 주는 듯했다.

때가 되면 피고 지는 꽃들인데 그 존재만으로도 힘을 준다니 참 신기하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너무 큰 욕심을 내고 말았다.

코스모스
뚱딴지(이름이 재밌어서 찾아봤더니 이 식물의 뿌리가 돼지감자란다.)
둥근 잎 나팔꽃


오랜만에 뛰다 보니 여기저기 통증들이 스물스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내 몸에 친절하게 대하기가 목표이기 때문에 불편감이 느껴지면 천천히 걷다가 조금씩 뛰어보다가를 반복했다.

종잡을 수 없는 점은, 걸을 때 아팠던 곳이 뛰면 괜찮아지는가 싶은데 반대로 걸을 때 아프지 않았던 부분이 뛰면 아파진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신체 불균형 때문인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


그렇게 내 몸을 살살 달래며 달리기를 하는데 예상치 않은 복병이 나타났다.

핸드폰으로 크게 음악을 틀고 길 한가운데를 당당히 걸어가고 있는, 언뜻 봐도 이 시간쯤 어김없이 산책을 즐기시는 것 같은 어르신 옆을 어떤 민폐도 없이 살짝 피해 가기 위해 조금 속도를 붙여 앞지르는 순간,

"어이구, 멋지십니다."

그 어르신의 한 마디에, 나는 '아고, 감사합니다'라는 멋쩍은 인사를 남긴 채, 그 속도를 줄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달릴 수밖에 없었다.

비가 오는 날에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즐기는 사람에게 던진 찬사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몇 분 동안은 오해의 힘을 빌려 멋진 사람인 채로 있고 싶어서였을까.

그 어르신이 시야에서 멀어져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쯤에서야 속도를 줄이고 걸을 수 있었다. 벌써부터 발목이 슬쩍 아파오고 있었지만, 괜스레 모양 빠질까 봐 좀 참고 계속 뛰었지 뭔가. 갑자기 픽 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 한마디가 뭐라고. 내 몸에 친절하기로 했다며?




나를 움직이게 하는 힘은 뭘까.

1. 스스로를 못살게 굴기

2.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

3. 타인의 민망스러운 부추김


아무튼 나는 안으로든 밖으로든 응원이 필요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