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의 우주' 첫 번째 책
<끝과 시작>,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7
내 방 서가에 꽂힌 책 중 이미 읽은 책도 있고 구입 후 흥미가 떨어져 한편에 밀어 놓은 책도 있고, 욕심껏 구입하고 채 읽지 못한 책들도 있다. 수많은 정보들에 휩쓸리지 말고 조용히 자신과 마주할 시간이 필요한 때, 나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책들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내 방에서 발견하는 책과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책들을 떠올려보는, 이름하여 나만의 '방콕' 서가에서 책을 읽는 "내 방의 우주"를 만들었다.
처음 집어 든 책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선집 <끝과 시작>
이 책은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한국에서 공수한 책이다. 3월에 주문해 4월 중순에 도착하고, 지금까지 서가 한편에 방치해두었다. 이곳에 온 뒤로 책 읽을 틈이 없기도 했다. 책을 읽기보다 새롭게 만나는 세상에 들떠 살짝 흥분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기보다 새로운 정보들을 찾고 듣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대륙의 넓은 하늘과 숲에 반해 산책하느라 정신을 뺏겼다. 슬슬 조금씩 관광객 모드에서 생활인으로, 일상으로 돌아오고자 한다. 책을 읽고 쓰기로 다시 마음을 먹자, '내 안의 우주'라는 이름이 떠올랐고, 드디어 몇 달 만에 비스와바의 <끝과 시작>을 꺼냈다.
비스와바가 평생 고르고 다듬고 찾아낸 시어들을 한 번에 소화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그때그때 잠자기 전 조금씩 만나보기로 한다. 어제는 1957년도 시들을 읽다 잠이 들었다. 한 줄 읽고 숨을 고르게 만드는 시들. 올해 초 러시아에 온 뒤 그녀의 유고 시집 <충분하다>가 출간했다. <충분하다>를 소개하는 글에서 한국에 번역된 그녀의 첫 시집 <끝과 시작>을 알게 되었다. 폴란드와 한국의 역사는 여러모로 닮았다. 힘센 나라들에 둘러싸여 싸움터가 되기도 하고 죽어간 이들도 많다. 폴란드라는 변방의 나라에 대해 우리가 알게 되고, 그녀의 시가 한국에 인기 있었던 이유도 이러한 역사적 공통점 때문인지 모른다.
그녀는 자신의 시가 역사와 죽은 자, 현실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글이 될까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였다. 자괴감과 불안을 느끼다가도 자신의 '솟구치는 말'이 '화산 같은 단어'로 표현되기를 갈망하며 '시의 지옥'에 들어가길 주저하지 않는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1923년 7월 2일 폴란드 쿠르니크 근교의 소도시 브닌에서 태어났다. 지방 영주의 관리인이었던 아버지 쉼보르스카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 로테르문트 사이에서 2녀 중 막내로, 어릴 적에는 영화 보기와 그림 그리기, 노랫말 쓰기를 즐겼다고 한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전해지는데, 아버지는 어머니와 스무 살의 나이 차이가 나는 사람으로 비스와바가 14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1945년 3월 14일 <폴란드 일보>에 "단어를 찾아서"를 발표하며 등단한다. 한국에 번역된 책 <끝과 시작>에는 1945년부터 2005년까지 작성된 시들이 실려있다. 그 후 2012년 사망할 때까지 쉼 없이 시를 출판하고 써왔다. 이 책에는 연대기별로 묶여 있으며 번역된 책의 첫 페이지는 "출판되지 않은 시들 가운데서"로 시작한다. 제목 없는 첫 번째 시는 1945년 시를 등단하기 시작할 때 작가의 마음가짐이 어디에 가닿았으니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시작한다.
한때 우리는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다.
닥치는 대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으나, 작고 평범한 세계 안에서 살아가던 작가는 역사의 패배와 전쟁의 전리품만 남은 상태에서 깨닫는다. 세상은 아주 크고 복잡하고 특별하다고. 그 크고 복잡하고 특별한 세계를 향해 작가는 단어를 고르고, 말할 수 없는 슬픔의 역사 안에서 솟구치는 말들을 시의 언어 속에 담아 내려했다. "단어를 찾아서"는 작가가 <폴란드 일보>에 첫 발표하며 등단한 시다. 첫 등단에 임하는 작가의 시에 대한 입장, 포부는 이렇다.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우리가 내뱉은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지 않을 단어들을 고르기 위해 작가는 '시의 지옥'을 헤매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시의 언어들은 치열하고 절절한 생을 둘러싼 충고이자 자기 다짐이자 독려이자 어두운 밤이 부르는 소리, 공포에 맞서 싸우려는 결연한 의지이다.
두 번은 없다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나는 이 작가의 이러한 절박하고 절실한 마음을 채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 마음을 기억하려 한다. 현실에 쉽게 굴복하고 타협하는 순간, 힘이 되는 글들이 있다. 반복되는 하루가 없을 만큼, 그녀는 매일 치열하게 시의 단어를 찾고, 시가 현실과 공명하고 나아가 현실을 꿰둟고 폭발하기를 기다린다.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이 힘겨운 나날들에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녀의 시가 왜 세상의 끝 한국까지 와서 한국인들의 마음을 위로했는지, 다독였는지, 힘을 주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어디에 가면 연민의 감정을 되찾을 수 있는지
비록 그것이 심장의 헛된 상상이 빚어낸
인공적인 감상에 불과할지라도
온 힘을 다해 노래 부르며
이성을 잃은 듯 덩실덩실 춤을 추십시오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은 여윈 자작나무 아래서
왁자지껄 흥겹게 놀아보는 거예요
우리는 비극의 순간에도, 힘겨운 나날들이 이어지는 하루하루에도 온 힘을 다해 연민의 감정을 놓지 않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그렁그렁 눈물을 머금고 왁자지껄 흥겹게 놀아야 한다.
인간이 자신의 감성과 감각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 그것이 곧 인간을 비인간화하고, 인간이 부끄러운 시대에 대한 우리들의 자세이자 해답이 아닐지 모른다. 그리고 또 우리에게 비껴 난 비극과 우리를 위해 희생된 이름 모를 것들과 죽은 자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억해야만 한다.
죽은 자의 불멸은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바로 그 순간까지만 유효한 법
눈물의 골짜기로 추락해버린 낱말들 따위는
죽은 자의 부활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저 울고만 있을 거냐고. 그저 한탄만 할 것이냐고.
우리는 숨을 고르고 살아나가기 위해, 그리고 기억하기 위해 매일 싸운다. 그리고 유혹의 순간, 무너지는 순간 유리로 만든 뇌와 심장이 또 박살이 나는 순간에도 다시 되살아나기를, 내 뇌와 심장이 유리가 아니라 따뜻한 온기의 그것이길 바란다. 굴복하기 않고, 우리는 어떻게 내 생을 붙잡을 수 있을까. 우주 공간을 속속들이 꿰뚷고 있는 시대에도 우리는 자신조차 지키지 못하고 길을 헤맨다.
그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다가오고 있다...
유리로 만든 뇌와 심장에 무참하게 생채기를 내기 위해서
지구에서 별에 이르는 저 광활한 우주 공간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는 박식하기 짝이 없는 우리들이 고작 대지에서 머리까지인 이 짧은 사정거리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녀는 시를 시작하던 처음의 자신의 시를 배반하지 않고 긴 세월 무던히도 천천히 한 단어 한 단어 찾고 써왔다. 다시 그녀가 처음 자신의 존재를 알린 시를 읽어본다. 온 힘을 다해 찾아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지만, 그녀는 평생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 그것을 찾기 위해 지옥을 헤매는 "'낮'의 미망인인 '밤'("사소한 공지 사항"에서 인용)"이다. 또한 그녀의 시는 대륙의 또 다른 끝에 있는 한국 사람들에 가닿고, 가만히 나의 길잡이로 이 곳에 와 있다.
"단어를 찾아서"
솟구치는 말들을 한마디로 표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의 생생함으로
사전에서 훔쳐 일상적인 단어를 골랐다
열심히 고민하고 따져보고 헤아려보지만
그 어느 것도 적절치 못하다
가장 용감한 단어는 여전히 비겁하고
가장 천박한 단어는 너무나 거룩하다.
가장 잔인한 단어는 지극히 자비롭고
가장 적대적인 단어는 퍽이나 온건하다
그 단어는 화산 같아야 한다.
격렬하게 솟구쳐 힘차게 분출되어야 한다
무서운 신이 분노처럼,
피 끓는 증오처럼.
나는 바란다. 그것이 하나의 단어로 표현되기를.
피로 흥건하게 물든 고문실 벽처럼
내 안에 무덤들이 똬리를 틀지언정
나는 정확하게, 분명하게 기술하고 싶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금 내가 듣고 쓰는 것, 그것으론 충분치 않다.
터무니없이 미약하다.
우리가 내뱉는 말에는 힘이 없다.
그 어떤 소리도 하찮은 신음에 불과하다.
온 힘을 다해 찾는다.
적절한 단어를 찾아 헤맨다.
그러나 찾을 수가 없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 사족: 폴란드 남부 크라쿠프krakow에서 작가는 주로 활동했다. 예술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 언젠가 폴란드에 가면 이 곳에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