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가을, 황금빛 포만감
장수동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논두렁의 색깔부터 달라졌다. 초록색 파도가 쳤던 들판은 어느새 누런 황금색으로 변했고, 길가에는 코스모스가 떼를 지어 흔들렸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 아니라 '전투의 계절'이었다. 산에 지천으로 널린 밤과 도토리를 두고 벌이는, 다람쥐와의 전쟁이자 동네 형들과의 경쟁이었다.
"야, 설(서울)뜨기. 진짜 왕밤이 어디 있는지 아냐?"
똥장군이 목소리를 깔고 은밀하게 속삭였다. "어딘데?" "공동묘지."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장수동 뒷산 중턱에 있는 공동묘지. 대낮에도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그곳.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절대 그 근처에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야, 귀신 나오잖아." "겁쟁이냐? 원래 무덤가 밤나무가 영양분을 잘 빨아먹어서 밤알이 주먹만 하단 말이야. 귀신도 밤 까먹느라 바빠서 우리 안 잡아가."
똥장군의 기적의 논리에 설득당한 나는 결국 운동화 끈을 조여 맸다. 우리는 각자 쌀 포대 하나씩을 허리춤에 차고 비장하게 뒷산을 올랐다.
산 입구부터 '툭, 투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잘 익은 밤송이가 떨어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똥장군은 길가에 떨어진 밤들은 쳐다보지도 않고 묘지 쪽으로 직진했다.
공동묘지에 들어서자 공기부터 서늘해졌다. 봉긋봉긋 솟은 무덤들 사이로 늙은 밤나무들이 귀신 머리카락처럼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똥장군 말대로였다. 무덤가 바닥에는 정말이지 내 주먹만 한 알밤들이 쩍 벌어진 밤송이 사이로 갈색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봤지? 쓸어 담아!"
우리는 공포도 잊은 채 밤 줍기에 열중했다. 발로 밤송이 양쪽을 지그시 밟고 벌리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알밤이 '쏙' 하고 빠져나왔다. 그 손맛은 낚시와는 또 다른 쾌감이었다. 가시에 찔려 손가락에서 피가 맺혀도, 쌀 포대가 묵직해지는 느낌에 아픈 줄도 몰랐다.
"야, 저기 봐! 쌍밤이다!" "이건 내가 먼저 봤어!"
우리는 무덤 위를 뛰어다니며(조상님들께는 죄송하지만) 밤을 주웠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산그림자가 길어지자, 봉긋한 무덤들이 거대한 짐승의 등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으, 으악!"
갑자기 똥장군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왜 그래? 귀신이야?" 나도 놀라서 털썩 주저앉았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 아니... 가시 찔렸어." 똥장군이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밤송이 위에 털썩 앉았던 것이다. "놀랐잖아, 이씨!"
우리는 킬킬거렸지만, 웃음소리는 금세 꼬리를 감췄다. 어디선가 '부엉-' 하고 부엉이 우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공동묘지는 순식간에 공포 영화 세트장으로 변했다.
"야... 가자." "어, 그, 그래. 많이 주웠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산을 뛰어 내려왔다. 무거운 쌀 포대가 덜렁거려 엉덩이를 때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누군가 "내 밤 내놔..." 하고 따라오는 것만 같았다.
가게 마당에 도착해서야 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봤냐? 아까 그 도깨비불?" 똥장군이 헐떡거리며 물었다. "도깨비불? 난 못 봤는데?" "아까 저기 나무 뒤에 파란 불이 번쩍했다니까!"
녀석은 또 허풍을 떨었지만, 이번엔 속아주기로 했다. 우리에게는 무용담이 필요했으니까.
그날 밤, 우리는 아궁이 잔불에 주워 온 밤을 구웠다. '탁! 타닥!' 밤 껍질이 터지는 소리가 폭죽처럼 들렸다.
"뜨거, 뜨거!" 호호 불어가며 껍질을 까니, 노란 속살이 드러났다. 입안에 넣자 고소하고 달콤한 맛이 퍼졌다. "야, 역시 묘지 밤이 최고다." 입가에 검댕을 묻힌 채 똥장군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귀신이 나올까 봐 오들오들 떨면서도, 입안 가득 퍼지는 군밤의 맛은 포기할 수 없었던 밤. 장수동의 가을밤은 그렇게 고소하고, 아주 조금은 오싹하게 깊어가고 있었다.
* 이미지 출처 : Created by A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