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 1

by 한밤

상담은 불행을 끝내기 위한 여정이었으나, 나를 더 깊은 불행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혼소송을 겪으며 평소처럼 제 역할을 해내기가 힘들었다.

아이를 케어하면서 동시에 엄마로서의 책임감으로 버텨야 했지만 아이 앞에서 이혼의 아픔을 억누르고 숨겨야 한다는 강박이 숨이 막힐 만큼 버거웠다.

나는 일상처럼 눈물을 흘리던 시기였고 아이의 얼굴도 점점 어두워져 갔다.

모두를 위해서라도 이 고통을 빨리 점프 뛰고 싶은 갈급함이 나를 지배했다.

결국 나는 내 속얘기를 가감 없이 가족과 지인들에게 털어놓으며 공감과 지지를 구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시시각각 달라졌고, 그때마다 내 고통은 더욱 악화됐다.

그리고 그들과도 어느 순간 단절감을 느꼈다.

아무리 가족이고 친구이지만 나와 같은 마음일 수는 없었다.

특히 친정엄마는 절대 이혼하면 안 된다고 보수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그건 내 슬픔이 불효까지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마저 더했다.

이혼이 흔한 시대라곤 하지만 내 주위에는 이혼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다들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잘 살아내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에 나만, 내 가정만 콕 집어 부서진 것 같았다.

이런 고통과 슬픔을 깊이 이해하고 조언해 줄 전문가가 내게 절실했다.

나는 지인의 추천으로 20년 이상 된 베테랑 상담사를 찾아가게 됐다.

상담실이 집에서 1시간 거리였지만 이 불행을 고칠 수만 있다면 비행기를 타야 했어도 갈 수 있는 심정이었다.


처음에는 수백 가지의 심리 질문지와 테스트가 이어졌다. 체계적인 절차와 오랜 경력에서 풍기는 분위기에 ‘잘 찾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고, 마침내 불행에서 벗어나리라는 희망도 생겼다.

나는 상담 내내 불안과 우울로 가득 찬 상황을 울음과 함께 쏟아냈다.

상담사는 이야기를 쭉 들어주며 간간이 “그랬군요, 힘드셨겠네요.” 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 공감 하나에도 내 아픔이 전문가에게 드디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고 착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이제 치료되겠다는 환상에 눈이 가려져 있었다.

사기당하는 과정이 이런 걸까.

불행은 내면을 무지하게 만든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한다.

두 번째 상담에서부터 상담사는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그래서 이혼에 부정적인 입장이지만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분명 이혼도 필요하지 않겠냐며 나를 두둔하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건 그냥 립서비스였나 싶을 만큼 이혼을 하면 전업주부였던 여자는 기초생활수급자가 된다며 아이를 위해서라도 이혼하지 말라고 말렸다.

이미 화해를 하거나 대화를 통해 풀어나갈 단계는 지난 지 오래였다.

나는 상대방이 집을 나가 이혼소장을 보낸 이야기를 다시 반복해야만 했다.

이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야 했다.

하지만 꿋꿋이 앉아있었다. 마치 그런 소리를 들어도 앉아있기만 하면 이 불행이 지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잘못된 믿음을 품은 채로.

상담이 거듭될수록 실망스러워졌다.


어느 날, 상담사는 내게 상대방의 좋았던 기억에 집중시키며 내 잘못도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상담 전부터 나를 책망하고 있었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내가 정말 상대방의 유책을 눈감지 않아서 내 아이마저 이런 불행에 빠트린 걸까?”

안타깝게도 그런 생각의 굴레들이 회복을 늦추고 있었는데도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상담사에게 내 잘못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땐 이미 스스로를 끝없이 질책하던 마음에 또 한 번 칼을 대는 느낌이었다.

그땐 이혼소송 초반이어서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미움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지금 생각하면 상담사는 그 분노를 축소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의 여유조차 없던 시기에 그 감정을 제대로 다뤄주기보다 덮어가려는 듯한 상담이 폭력처럼 다가왔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상담사는 “그러면 상담이 안 된다”며 나를 문제 삼기 시작했다.

나는 상대방이 나르시시스트임을 분명히 했다. 그동안 연기를 아주 잘해왔었다고 강조했지만 나이가 많은 상담사는 나르시시스트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한 듯 그건 상대방의 “노력”이었을 거라고 강조했다. 상대를 자꾸 좋았던 사람으로 미화시키려는 방식은 나에게 하등 쓸모없는 시간낭비였다. 나아가 ‘너도 잘못했고 둘 다 잘못했어. 그러니 인정해.’라고 왜곡되게 강요받는 기분마저 들었다.

나는 이제 상담이 불쾌해졌다.


상담사는 내게 이혼을 너무 크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도 했다.

내 불행이 경시받는 느낌이었다.

연인과의 짧고 불같았던 만남과 헤어짐이었다면 이런 상담사의 말을 기꺼이 이해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아이까지 있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배신당한 마음의 고통을 인생에서 별 거 아닌 일로 치부받는 건 썩 좋지 않은 기분이었다.

나한테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때마다 상대방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너는 너무 예민해, 그것도 너의 문제’라고 내게 하던 말과 닮아있었다.

그러나 설상가상은 계속되었다.

어렸을 적 트라우마가 그대로 남아있기에 내 인생이 자꾸만 어린 시절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했다.

‘근데 어린 시절은 고칠 수가 없잖아요?’

그 말은 결국 내 존재와 지금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마저 흔들어놓았다.

계속 이 상태에 갇혀있어야 한다는 불치병 선고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 왜 있어야 하는 건지의 근본적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한없이 쪼그라든 지금의 내 모습만 도드라졌다.

절대 걷히지 않을 것만 같은 먹구름이 드리웠다.

빨간 일을 겪었으면 빨간 색안경만 쓸 수 있고 검은 일을 겪었으면 검은 색안경으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는 건 내게 더 큰 혼돈과 두려움을 주었다.

그 안경을 벗기 위해 상담을 받는 거 아닌가?

이혼가정에서 자랐다고 똑같이 이혼을 반복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럼 내 아이도?

나는 이제 상담이 믿어지지 않았다.


결정적인 순간은 어느 날,

상대방 이야기를 하다 분통을 터뜨린 나에게 상담사가 던진 한마디였다.

“오죽하면 남편이 집을 나갔겠어요?”

시어머니 같은 말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상담실을 박차고 나왔다.

후에 그녀는 장문의 메시지로 그건 내면치료의 한 과정이었고 그때 많은 이들이 힘들어한다는 얼토당토않은 해명을 해댔다.

그런 내면 치료는 필요도 없었고 원치도 않았다.

나는 그녀와 10번을 만났지만 결국 더 무력해졌고 비싼 값을 치르고서야 그만두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차라리 그 돈으로 아이와 맛있는 걸 사 먹거나, 여행이나 갈 걸 하는 후회에 사로잡히곤 한다.

그 후로 구청과 법원이 연계해 준 상담도 이용해 봤지만 치유의 과정은 내게 오지 않았다.

“상담했다고 뭐가 바뀌진 않아요.”

그들이 상담 전 경고처럼 내뱉던 말은 상담에 대한 매너리즘에 빠지게 했다.

인생이 바뀌진 않더라도 마음이 바뀌고 행동할 의지조차 심어줄 수 없다면 대체 왜 상담을 해야 할까? 그렇게 의심과 상심만 커지는 날이 이어졌다.


그러다 나는... 마침내 나에게 꼭 맞는 상담사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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