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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13. 2024

서울로 돌아와 맞이하는 아침

과거에 빌라 같은 구조의 아파트에서 거주한 적이 있다. 두 개뿐인 방에 네 명인 우리 식구가 이십 년 가까이 산 곳이기도 하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삼촌들이 우리 집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고 한다.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내가 안방을 썼다고 하면 남는 건 좁은 거실과 작은 방 하나뿐이다. 누가 어느 공간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의문스럽지만, 이 시기의 나는 쾌활하면서도 명랑했다고 전해진다.


"아이고, 막내가 일어나야 하는데..." 엄마나 아빠가 막내 삼촌이 일어날 시간이라고 혼잣말을 하면  "어! 내가 깨우고 올게!" 나는 우렁차게 대답했다고 한다. 미닫이 문을 슬그머니 열고 삼촌방으로 들어간 내가 침대 모서리 위로 올라가서는 삼촌의 배 위로 과감하게 뛰어올랐다고 하던데. 삼촌의 굵은 비명소리가 뒤이어 들렸다고 하던데.. 삼촌은 여전히 건강하고, 나는 내향적인 어른으로 성장했다. 


아빠는 가끔 막내 삼촌 얘기를 꺼내고는 한다. "쟤는 누구를 저렇게 닮았을까?" 하는 물음의 답을 찾으려 할 때다. 막내 삼촌은 학창 시절에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둘째 삼촌이 성적은 더 좋았지만, 공부하는 시간 대비 결과는 막내 삼촌이 뛰어났다고 들었다. "조금만 더 부지런했으면..." 똑똑한 막내 삼촌은 언제나 게으름을 연상하는 말을 끝으로 퇴장한다. 


부지런한 딸이 자신과 닮았다고 아빠는 또한 말한다. 챙기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해내는 누나는 아침잠이 많다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한다. 반면에 '쟤'로 일컬어지는 나는 막내 삼촌과 닮은 점이 많다고 아빠는 설명한다. 그러면서 자신과는 닮지 않았다고 하는데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친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왔던 한 친구는 아빠가 말하는 것을 듣고 "닮은 것은 기본이고, 하는 개그까지 비슷해..."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기고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빠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나의 게으름은 꾸준히 발달되어 왔다. 흔히 '꾸물꾸물'로 표현되고는 하는데 최근에는 "쟤 아직도 안 나갔어?"를 듣는 편이다. 현관 앞에서 꼼지락 거리다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던 아빠에게 발각되는 장면에서 주로 쓰인다. 중요한 일정에 있어서는 다만 결코 늦지 않는다, 그간 회사를 다니며 지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물론 학교를 다닐 때는 행사처럼 한 번씩 늦고는 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평소와 달리 세상이 고요하고, 평온함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끼며 멍한 상태로 가만히 있다가 시계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며 양치만 하고 튀어나가는 그런 날이 제법 있었다.      


중요한 일정이 드문 백수 신분일 때는 늦잠을 자는 빈도가 꽤 늘어난다. 꾸물거림의 한 가지 형태인 늦잠은 흔히 게으름의 상징처럼 불린다. 일할 때는 아침 7시 정도에 일어났다. 이마저도 여유로워 아침을 이따금 챙겨 먹기도 했다. 일어나는 시간이 한번 늦춰지면 앞당기는 건 매우 어렵다. 하루를 일찍 시작하며 경험하게 되는 피로감을 감내하며 일정 기간을 보내야 새로운 시간에 적응할 수 있다. 강원도에서 아침 7~8시에 일어나려고 꾸준히 노력한 것도 곧장 취업할지 모를 서울에서의 생활을 고려한 까닭이다. 실제로 이 시간 안에서 대부분의 아침을 맞았고 한 달 동안 하루라는 시간을 마음껏, 길게 활용할 수 있었다.  



으아앗, 벌써 아침 10시라니!


서울로 돌아온 지 단 하루 만에 일어나는 시간이 기적처럼 늦춰지는 경험을 했다. 그렇다. 나는 어느덧 한 달 살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강원도로 내려가기까지, 그곳에서 한 달간 생활하기까지 오 년이 넘는 기간을 고민했다. 취업이 다시 되지 않을까 불안하기도 했고,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을지 겁이 나기도 했다.

잘 다니던 회사를 끝내 그만두고 강원도로 향했다. 그곳에서 살아가면서도 희망과 절망 사이를 수없이 오갔다. 한 달간 쉬는 게 내가 해야 하는 유일한 역할이자 몫이었지만 혼자라는 외로움, 백수라는 불안감, 앞으로의 삶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한 달을 마치 두세 달처럼 인식하게 했다. 그러나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 데는 세 시간 남짓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짐부터 정리하고,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침대에 일찍 누웠다. 익숙함과 이질감의 경계를 오가면서도 에어컨이 망가진 차를 운전하며 흘린 땀 덕분에 금세 잠에 들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알람을 분명 맞춰 놓았건만 눈을 뜨니 아침 10시가 되어 있었다. 곧장 취업하며 일하게 될 나를 생각하며 갖은 유혹에도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유지했는데. 그렇게 한 달을 부지런히 살아왔는데. 원래의 게으른 모습으로 돌아가는 데는 단 하루면 충분했다. 


이후 며칠을 내리 주말 같은 생활을 유지했다. 늦잠은 기본이고, 핸드폰에서 손을 좀처럼 떼기 어려웠다. 게으름의 상징과도 같았던 '꾸물거림 김수호'가 부지런했던 강원도 생활이 무색하게 부활한 것이다. 돌아보면 부지런히 생활하도록 도운 내적 동기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강원도에서의 늦잠은 곧 한 달 살기 실패라는 다소 파국적인 결말을 떠올리게 했다. 어렵게 마련한 한 달의 유예기간을 허투루 썼다는 자책감과 그로 인한 좌절감을 두려워한 까닭도 있었다. 한 달을 성실하게 살고 서울로 돌아와 만나는 사람들에게 당당히, 흐트러짐 없이 알차게 보낸 강원도에서의 시간을 나는 소개하고 싶었다.


서울로 막상 돌아오자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백수라는 신분이 이전처럼 크게 체감되었다. 단 하루를 집에서 보냈을 뿐이지만 삶에 대한 마음가짐이 일순간 뒤바뀌었다. 어떠한 목적이 있을 때는 그것을 달성 가능한 형태의 목표로 구성하여 이루어갈 수 있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사원이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조건이 있겠지만, 성실함으로 나를 내세우고자 결심했다면 제시간에 출근하는 게 하나의 목표가 될 수 있다. 


강원도에서 보낸 기간을 포함하여 백수 두 달 차가 된 나는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오후부터 느지막이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가 늘어갔다. 처음에는 일찍 일어나는 데 목표를 두고 부지런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일찍 일어나야 할 이유가 아무래도 없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지만 다시 잠드는 행동이 반복됐다.

언제부턴간 '일찍 일어나야지'가 아니라 '일찍 일어나지 못한 나'를 향한 비난이 이어졌다. 과할 때는 '이럴 거면 회사를 왜 그만둬서'처럼 퇴사를 결심했던 당시의 절박한 마음을 외면하는 날 선 말을 하기도 했다.


예전 같았으면 자기 비난에 절여진 상태로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늦게 맞이한 하루이므로 '오늘 하루 조졌네' 생각하며 더 후회할 만한 행동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서 해야 하거나 필요한 일들을 하나씩 해나가면 된다. 한두 시간 잠을 더 잔다고 해서 내게 문제가 될 만한 상황은 전혀 생기지 않는다. 다만 자신을 향한 혐오감이 마음 주변에 짙게 깔려 있을 때는 혐오의 근거가 될 만한 행동을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그래, 너는 스스로 혐오할 만한 대상이 맞다'라는 답을 설명하기 위해 그럴싸한 공식을 만들어내듯, 스스로 기피하고 거부하는 행동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한 달간의 강원도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달라졌다. 마음 상태를 알아차리는 주기가 짧아졌다. 그간의 서울 생활에서는 자극에 찌들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수많은 외부 자극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에 대처하느라 마음을 살피거나 돌아볼 내적 여유가 부족했다. 반면에 강원도에서는 외부 자극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건강한 삶을 위해 자극 거리를 오히려 만들어야 할 판이었다. 자극으로부터 고요한 상태로, 나로부터 삶을 살아가다 보니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메아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과거라면 얼핏 들려도 분명 덮어두려고 했을 테다. 당장의 현실을 살아가는 게 벅찼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원도에서의 삶을 통해 그 메아리가 전하는 감정의 일어남이, 그 감정이 의미하는 무언가가, 그것을 알아차리고 마주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찰나가 나의 개인적인 삶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라도 마음먹기에 따라 나의 하루는 달라질 수 있다


게으름으로 인한 '하루 망침'의 패턴에도, 동기가 부족할 때는 활성화되는 늦잠에도, 강원도에서 부지런히 생활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점은 생각과 행동의 간격을 줄인 데 있다. 혐오라는 감정은 스스로를 향하는 비난의 언어를 내면에서 고함치도록 유도한다. 만약 비난의 언어가 발생하는 원인을 알고 있다면 자신을 혐오하기 위한 달콤한 목소리에 넘어갈지, 말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알아차리는 시간이 빠를수록 나를 위한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을 일찍 시작할 수 있다. 


취업이 늘어질수록 나는 스스로 자기 관리를 해내야 한다. 즉,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이유가 부족한 기간이 줄곧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취업을 한 뒤로부터 부지런한 생활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유지하는 게 내게는 필요하다. 그러나 매일을 출근할 때처럼 일어나는 일이 쉽지 않게 느껴진다. 취업을 못하는 내가 쓸모없다고 느껴지면, 이 느낌이 나를 집어삼킬 것처럼 커지면 나는 무기력하게 늦잠을 허락하고 말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늦잠을 자더라도, 오후부터 하루를 시작하더라도 깨어난 그때부터 나의 하루를 유쾌하게, 그리고 알차게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과거라면 '이렇게 또 하루를 허무하게 보내고 말았네' 생각하며 좌절했을 것이다. 오늘의 나는 '비록 하루를 늦게 시작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시간을 의미 있게 보냈네'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패배감에 물들어 하루를 마무리하는 경우도 물론 있었다. 그렇지만 다음날이 되면 나는 다시 도전한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강원도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루씩, 순간마다 나를 위해 살아가 보기로 결심한다.


'밥 잘 챙겨 먹고, 운동하고, 글 쓰고, 사람들 만나고, 구직하며, 나를 위한 행동에 집중하며 살아가야지'


Image by Tamal Roy from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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