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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근거림 Jun 06. 2024

강원도에서의 마지막 날, 밤

"저, 이제 시험 끝났어요"

상담사로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재영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 저 근처에 있어요. 지도 캡처해서 보내주시면 거기로 갈게요"

기차를 타고 강릉까지 온 재영을 만나기 위해, 동해시에서 넘어온 나는 답장했다.


"선생님, 여기요!"

재영을 발견하고 그의 이름을 크게 외치는 순간, '콰과과과광'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내 근처에 사람이 있지는 않았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걸 느꼈다. 재영 또한 그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일순간에 나와 눈이 마주쳤다. 풍선에서 바람이 슬며시 빠지는 듯한 내 목소리보다 사고의 효과는 굉장했다.

"어어.. 선생님. 괜찮으세요?"

이내 다가온 재영은 물었다. 차 밑바닥이 도보에 긁히며 난 소리가 내가 느낀 진동보다 우렁찼나 보다.

"하하... 아.. 아파요..."

내 몸이 다치면 그래도 나을 텐데. 차에 흠집이 생기는 건 대단히 쓰라렸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여행지의 독립서점을 찾아가 보는 편이다. 특히 독립서점마다 풍기는 저마다의 분위기를 체험해 보는 걸 좋아한다. 그러나 강원도에 와서는 한 번도 서점을 찾지 않았다. 숙소 주변의 서점들은 육지 깊은 곳으로 이동해야만 들를 수 있었다. 바다가 내다보이는 카페에 매일 들렀던 내게 도심이나 거주지 인근에 위치한 서점으로 가는 일은 왜인지 모르게 거부감이 들었다. 재영이 책을 좋아하는 알았던 나는 근처 서점에 들러볼 것을 제안했다. 그는 강릉에서 나를 처음 발견했던, 차의 굉음으로 말미암아 내 쪽을 돌아보던 신속한 고갯짓처럼 그러자고 대답했다. 


이십 분 남짓 서점을 둘러보고 우리는 바다로 향했다. 우린 바다를 좋아한다. 서울에서 두 시간이면 강원도 바다에 도착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바다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는 바다를 자주 그리워한다. 일상을 살아가며 '바다가 보고 싶다'는 말을 돌림 노래처럼 부르곤 한다. 삶의 괴로움에 에워싸여 그것이 주는 고통과 생각의 더미에서 허우적대며 바다는 오롯이 특별한 순간에만 갈 수 있는 상상의 장소로 탈바꿈시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바다에 왔다는 것은 해야 하는 일과 되어야 하는 모습으로부터 강하게 저항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말이 된 강문해변에는 인파가 넘쳤다. 경포호로 벚꽃 구경을 갔던 어느 날 이후로 주말에는 대부분 숙소 주변에서 시간을 보냈다. 어딜 가든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주차할 자리가 마땅치 않아 공용주차장을 세 바뀌 돌고 나서 '이것이 관광지로서의 강원도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요한 바다가, 한적한 강원도가 아무래도 좋았다. 영진해변의 카페에서 날마다 만난 바다, 숨이 머무는 골목에서 올려다본 하늘 정경, 스치는 사람마다 느낄 수 있는 넉넉한 걸음걸이. 묵호항으로 나아가는 고독한 길, 논골담길에서 내려다보는 동네 경치, 육지로 밀려드는 푸르른 파도. 눈을 감으면 한 장면씩 강원도의 순간이 생생히 떠오른다. 


강원도에서는 지역 모임에 이틀 참여한 것을 제외하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내가 참여했던 모임은 보드게임을 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내 이름이나 하는 일, 강원도로 내려오게 된 사정은 중요치 않았다. 그러므로 게임의 룰을 설명하거나 추임새를 넣을 때를 제외하고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상담사로서 여러 업무를 소화하던 내가 마치 묵언수행을 하듯 하루 대부분을 침묵하며 지내니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재영은 서울과 경기를 오가며 보낸, 나는 강원도에서 지낸 세월에 대해 나누었다. 그는 상담사가 아닌 다른 직업으로 살아가는 기대를,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튕긴 동전이 손등으로 이내 떨어지듯 관성처럼 지나가버린 한 달 살기의 아쉬움에 대해 말했다. 서로가 꺼낸 말의 주제는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다. 


자유롭게 살아가기


나는 자유를 '통제나 억제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의 책임과 몫을 이해하고 기꺼이 행동하는 것'으로 정리한 적이 있다. 불가피한 조건 속에서도 우리는 자신에게 보다 자유로운 선택을 내릴 수 있다.

선택 뒤에는 행동이 다만 뒤따라야 한다. 자유로운 삶을 꿈꾸던 나는 강원도에서 한 달을 꼬박 살았다. 내가 고대하던 자유는 관광지를 쏘아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새로운 사람을 쫓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규칙적인 생활을 토대로 틈틈이 주어지는 나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활동으로 만끽하는 삶을 실천했다. 꾸준히 운동하고, 적정한 양과 질의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집안일을 마친 뒤에 바다로 향했다. 바다에서 나는 음악과 글과 호흡과 함께 마음을 내다보았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데에 반드시 필요한 시간부터 보내고 자유로운 시간을 나는 맞았다.


하루씩 돌아보면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무료할 때도 많았고 무엇보다 외로웠다. 하지만 이토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 적이 없었다. 지난 한 달을 회고하며 강원도에서 수확한 가장 큰 깨달음은 '놓아버림'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알아차리고, 마주 보다가 그대로 흘러가도록 놓아두는 과정을 이따금 경험했다. 과거로부터 켜켜이 쌓인 감정 에너지와 조우했던 순간은 폭우가 내리던 어느 날의 묵호 해변과 닮았다. 


Image by Henryk Niestrój from Pixabay


밤이었다. 비가 내렸다. 인적이 끊겼다. 어둠이 삼엄하게 거리를 뒤엎었다. '숙소로 돌아갈까?' 하면 가로등 불빛이 나타났다. 자박이거나 저벅이는 소리가, 양손으로 움켜 쥔 우산과 그 위로 투둑이는 빗방울이, 빗물이 스며든 양말이 살아있다는 감각으로 나를 초대했다. 두려웠다. 막다른 길에 이르지는 않을까. 되돌아오지 못하지는 않을까. 험궂은 사람을 만나면 어떡하지. 신체 감각을 이내 알아차리며 공연한 걱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누군가가 걸었던, 그 누군가를 단 한 명도 모르지만, 질근질근한 회귀에 저항하며 선로를 이탈하기 위해, 꿈으로 향한 누군가들의 길이라고 믿고 나아간다.


묵호항을 지나 해변에 다다르니 바다가 보였다. 자를 대고 하늘과 바다를 구분한 것처럼 수평선은 남색이 덜하고 더한 색감으로 나뉘어 있었다. 보행로를 따라 도째비 스카이밸리에 오르는 길이 정면에서 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바위로 달려드는 거센 파도가 온 힘으로 부딪친다. 오물을 힘껏 내뱉고, 양팔을 하늘로 벌리며 소리를 내지르는 듯한 쾌감이 느껴졌다. 옷이 구석구석 비에 젖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그곳에 서있었다. 가만히 보니 나와 닮은 듯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애를 써도 사라지지 않을 고통이지만,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최선을 거듭하던 나. 파도는 차갑게, 더욱 거칠게 바위를 노렸지만, 바위는 흔들리지 않았다.


우리네 삶은 고통의 연속이다. 내 삶도 마찬가지다. 고통이라고 일컬을 사건들이 내 주위에서 언제고 일어날 수 있으므로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바다 틈에 뿌리내린 바위를 없애려고 혈안이 될 게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길은 선택해야 한다. 강원도에서 나는 서울에서와 정반대의 삶을 살았다. 이곳에서는 자극이 적었고, 원래 그곳에서는 자극이 많았다. 여기 바다는 잔잔하고, 서울 저기 바다는 이 순간 목도하고 있는, 비바람을 더하여 바위로 부딪치는 성난 파도와 같다.


놓아버리기로 한다. 서울로 돌아가면 고통스러운 순간이 이내 찾아올 것이다. 잦아들 테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바위를 만날 때마다 움찔하며 식은땀을 또한 흘릴 것이다. 괜찮다. 수많은 바위를 만날 수밖에 없다면, 그게 삶이라면 나는 바다에 집중하기로 결심한다. 나로 살아간다는 건 바다와 바위를 구분하고, 자연히 일어나고 마주치는 서로를 알아주며, 물결치는 파도가 그대로 흐르도록 가만히 놓아두는 게 아닐까. 


고기잡이 배들이 별처럼 반짝인다. 깨어있다. 예상되는 서울에서의 고단한 삶에도 놓아버림이 함께 하는 한 두려움은 없다. 호흡하고, 묵상하고, 알아차리고, 흘려보내며 기꺼이 살아보기로 한다. 




재영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그와의 대화를 회상하며 한 달간의 강원도 생활을 마무리한다. 여전히 아쉬운 것은 사람들과 더 교류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재영과 보낸 반나절의 시간이 환기하듯 상쾌한 감각으로 다가왔다. 서울로 잘 돌아갔을까. 나도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데. 


마시지 않던 맥주를 한 캔 땄다. 그래도 오늘은 이대로 혼자,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다.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자유로운 이 시간을, 자유로웠던 그때 그 순간들을 마음으로 고이 간직하기로 살며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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