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근거림 Oct 06. 2024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저변의 마음


그동안 살아오며 무수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출근길 지하철 한 장면만 떠올려도 그 수는 가히 폭발적이다. 하지만 그간 마주쳤던 사람들 중에 내가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살아가다 의식으로 자연스레 찾아와 슬며시 미소를 띠는 사람은 특히 적다. 오늘은 그중 한 사람에 관하여 적어볼까 한다. 




대학생이 된 나는 무엇을 하든 버겁다고 느꼈다. 친구를 사귀는 일조차 고되었으니까. 서로 다른 삶의 경험과 배경을 가진, 동네라는 경계를 벗어난 이들과 가까워지는 일은 어려웠다. 누군가는 어려서 보았던 삼촌의 술잔처럼 목 넘김을 편안하게 가져갔다. 다른 누군가는 벚꽃이 채 피기도 전에 연애를 시작했다. 통학하는 지역이나 친밀감을 바탕으로 어울리는 무리가 금세 만들어졌다.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능동적으로 행동해야 쉽게 적응할 수 있는 대학교라는 환경은 내게 치열하고도 냉혹한 곳이었다. 


나는 실수하는 걸 싫어한다. 나쁜 결과와 의도치 않게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정확하게는 실수를 하는 순간보다 나의 행동이 실수였다고 타인에게 발견되는 순간을 혐오한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하며 성장한다. 실수라고 평가한 과거의 행동을 돌아보며 유사한 상황에서 하게 될 행동을 결정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비슷한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은 줄어든다. 그러나 실수를 잘못으로 인식할수록 선택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생긴다. 그야말로 저질러서는 안 되었고, 비난이나 처벌을 받아도 마땅한 행동이었다고 자신의 실수를 앞서 평가하게 되기 때문이다.  


잘못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택도 내리지 않는 게 필요했다. 선택해야 할 상황에 나를 노출시키지 않도록 신중하게 행동했다.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렸고, 다니던 길로만 가고, 익숙한 경험만 쫓았다. 집밖으로 나가는 일도 드물었다. 

물론, 방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만족스럽진 않았다. 이따금 창문으로 햇볕이 살랑거리며 들어왔지만, 누리고 싶었지만, 바라보기만 했다. 강의가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보았던, 볕 아래에서 떠들썩하게 장난치며 나란히 걷는 친구들의 장면에 나를 포함시킬 수 없었다.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안에서 숨죽이며 하루를 소비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자신의 의지로 문밖으로 나가는 일이, 순간이 두려웠던 까닭이다.


"우리 집 근처에서 어린이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데 너도 갈래?"

화사했던 봄의 흔적이 말끔히 사라져 갈 무렵, 주현은 말했다. 나는 주현과 특별히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었다. 통학버스를 기다리던 줄에서 우연히 만난 주현은 자신이 신청한 자원봉사 활동을 소개했다. 집 근처 복지관에서 어린이날을 맞아 가족 운동회를 하는데 행사를 보조할 자원봉사자를 모집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돌아보면, 특별한 의도 없이 마침 생각이 나서 꺼낸 이야기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주현과는 친분을 느낄 만한 어떠한 경험도 한 적이 없었다. 얼굴은 알고 있어서 인사는 했지만 침묵이 감돌자 그냥 물어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에게 초대(?)를 받은 듯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나도 참여하겠다고 단숨에 대답했다.  


운동회 당일, 고심 끝에 어린이날을 맞아 진행되는 행사임을 감안하여 노란색 후드티를 입었다. 운동회에 참여할 아이들에게 밝은 인상을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순수한 정성을 알아준 대상은 모래주머니를 세차게 던지던, 줄을 힘차게 당기던 아이들이 아니었다. 

"오, 어린이날 행사라고 노란색 티 입고 온 거예요?"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친 몇몇 복지사 선생님들은 노랗게 물든 나를 발견하고 쾌활하게 웃었다. 쑥스러운 나머지 '다른 옷을 입고 올걸 그랬나?'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얼굴이 발갛게 피어오르는 순간이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내가 노란색 옷을 고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의도를 알아준 것이다. 

복지사 선생님들은 달랐다. 외부로 드러난 상황에 국한하여 나의 모습을 해석하지 않았다. 20살의 자원봉사자였던 나로부터 나의 모습을 이해하려고 했다. 


나는 가족 운동회를 시작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복지관에 들렀다. 군 입대를 하기 전까지 복지관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우수 자원봉사자로 매년 선정되었다. 물론, 봉사활동 시간이 많아서 상장을 받았을 뿐 행동은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복지관에서는 연령이나 발단 단계에 맞추어 프로그램이 운영되었다. 형태가 아주 다양했다. 이러한 저마다의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사전 준비가 필수적이었다. 나는 이름표를 만드는 간단한 작업부터, 다과를 사 와서 접시에 담는다든지, 프로그램실을 꾸민다든지, 심지어는 1박 2일의 캠프를 다녀오기 위해 레크리에이션 도구를 만들기도 했다. 


복지관 선생님들 중에 팀장이라는 직함을 맡고 있던 연숙 선생님을 나는 무서워했다. 이 무서움은 내가 연숙 선생님을 대하며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었다. 일을 할 때 보이는 선생님의 엄격한 태도에서 비롯했다. 선생님은 일의 완성도를 중요시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팀원들에게, 내가 따르던 복지사 선생님들에게 때때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말을 꺼내는 것 같았다. 그때는 몰랐지만, 선생님들이 화장실을 수시로 오가며 화장을 고쳤던 이유를 이제는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일의 결과를 두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선생님의 모습은 엄마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했다. 엄마는 자신의 기준대로 행동하기를 내게 요구했다. 그대로 하지 않았을 때 "거봐"를 시작으로 꾸짖는 반응이 뒤따랐다. 때로는 빗자루를 한 손에 들고 엄격하게 나의 행동을 나무라기도 했다. 저의는 묻지 않고 결과만을 두고 잘못으로 판단하는 엄마에게 나는 억울한 마음이 들 때가 많았다.


연숙 선생님과 대화할 때면 늘 주눅이 들었다. 잘못을 벌써 저지른 사람처럼 행동했다. 사무실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가야 다다를 수 있던 선생님의 자리를 알게 모르게 기피하던 도중에 상황이 발생했다. 선생님이 내게 일을 부탁한 것이다. 선생님은 가위와 풀로 파일철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프로그램 이름과 연도, 담당부서가 적힌 용지를 가위로 오려서 위치에 알맞게 붙이는 작업이었다. 단순하고도 간단한 일이 분명하지만, 적어도 그 당시 나에게는 상당히 곤란한 일이었다.  

파일철과 재료들을 받아 들고 자원봉사자 책상에 앉아 두려움에 떨었다. 만들기를 시작하기도 전에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글자가 잘리게 오리면 어떡하지?', '파일철에 삐뚤게 붙이면 어떡하지?' 같은 생각에 멈추지 않고 선생님께 혼나는 장면까지로 상상은 이어졌다. 


"너, 이렇게 간단한 것도 못 하는구나. 한심하다!"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내면에 깔려 있던 평가하는 엄마의 잔상과 다른 선생님을 대하던 연숙 선생님을 보며 간접적으로 경험한 모습이 겹쳐지며 공포감을 불러일으켰다. 잘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클수록 실수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네모 반듯한 선에 가위가 침범하기 일쑤였고, 붙이는 것마다 칸으로부터 비뚤어져 있었다. 완성도가 떨어지는 결과물이 쌓일수록 자책은 심해졌다. 급기야 손마저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선생님에게 찾아가 못하겠다고 했다. 파일철을 하나 보여주며 남은 파일마저 망쳐버릴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다시 해보라고 대답했다. 손에 쥔 파일철을 내게 돌려주는 모습조차 표정이 드러나지 않아 무섭게 느껴졌다. 대꾸할 용기는 없었다. 자리로 돌아온 나는 파일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것은 전보다 칸을 크게 벗어났고, 어떤 것은 자칫 삼각형이 될 뻔했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었다. 그러다가 파일철 하나를 그럴싸하게 만들어냈다. 다른 파일철들과 비교했을 때 완성도가 분명 뛰어났다. 가위질 한 번, 풀질 하나에 숨죽이며 집중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나타났다. 선생님의 등장은 나의 등 뒤에서 튀어나온 선생님의 손으로 알아차렸으므로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화들짝 놀랐다. 파일철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선생님은 말했다. 


"오~ 점점 잘 만들고 있네. 거봐. 수호도 하다 보면 해낼 수 있잖아"


선생님은 부탁한 일에 있어서 내가 잘 해내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꾸준히 시도하다 보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파일철을 만드는 일을 끝마칠 때까지 실수를 반복하기는 했지만, 요령을 터득하며 실수의 범위를 줄여나갈 수 있었다. 

선생님은 서투른 모양의 파일철을 비록 내내 사용해야만 했겠지만, 크나큰 경험을 내게 선물했다. 시도하지 않으면 불만족스럽다고 느끼는 그 무엇도 달라질 수 없고, 시도하는 과정은 실수를 연발하게 할 것이며, 잘못은 하지 않을수록 좋지만 실수는 겪을수록 능숙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자원봉사 활동을 이어가며 대학교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서울 곳곳을 다니기 시작하기도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로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했다. 700시간에 가까운 경험을 살려 첫 직장에 취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그곳 복지관이야말로 내게는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다.  


Photo by Pixabay: https://www.pexels.com/photo/red-wooden-lounge-chair-on-brown-boardwalk-near-body-


강원도에 다녀온 후로부터 여전히 구직과 씨름하고 있다. 입사 지원을 새로이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처음 한두 곳에는 정성이 가득한 지원서를 제출한다. 지원할 회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여기저기 살펴보고, 블로그나 뉴스를 통해 정보를 꼼꼼하게 수집한다. 

지원서 폴더에 생성되는 이력서 파일이 쌓을수록 간절함은 더해진다. 또 떨어지게 될 거라는 패배감이 키보드 위에 선 손가락을 더디게 만든다. 지원하는 행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려고 기를 쓰기 시작한다.

시작은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한다. 설레기만 한 출발은 없다. 새로운 형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일이 내게 펼쳐질지 모른다는 불확실성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을 인식하고, 마주하고, 인정하고, 알아줄 수 있어야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한 첫 발을 비로소 뗄 수 있다.   


내게는 여전히 실수하는 나 자신을 혐오하려는 태도가 남아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사정을 끝없이 알아주어도 실수가 발견되면 누가 뭐라 하기 전에 나를 스스로 비난하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그래서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순간을 아직도 기피하고 싶어 한다. 가능하다면 스스로 예측할 수 있고,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범위 내에서 행동하고 싶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삶은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햇볕과 함께 사람들이 다정하게 다가와주기를 바랐던 건, 적어도 방 안에서 웅크리던 내겐 환상에 가까웠다.

봉사활동에 같이 가자는 친구의 말에 응답했고, 자원봉사 활동을 하며 도망치고 싶었던 많은 상황들을 견뎠으며, 어설픈 모양으로 만들어지는 파일철을 보면서도 체념하지 않고 가위와 풀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나는 나를 위한 행동이라면 기꺼이 해보기로 새삼 결심한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울 때면 연숙 선생님의 마음이 이따금 떠오른다. 또한 복지관에서 만난 선생님들, 프로그램에 함께 참여했던 이들, 자원봉사자들, 그리고 그들과 어울리며 한 뼘씩 성장하던 내가 무수히 많은 장면들 속에서 미소 짓고 있다. 그 미소는 원한다면 그래도 계속 가보라고 내게 말한다. 

도전하다 보면 한계에 부딪치기도 하겠지만,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졌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해낼 수 있는 만큼 도전하고, 일어서고,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래, 뭐 어디 뽑힐 때까지 지원해 보자!"

경직되어 있던 손가락이 경쾌하게 움직인다. 악에 받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새로운 환경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을 기대하며.  


    

이전 07화 내가 좋아하는 익살스러운 모습으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