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의로 포장된 침범이었다.
따르릉.
"어머님.
저 아인이 담임 선생님인데요.
하실 말씀은 저에게 해주세요.
오전에 이야기 끝난 건데
다른 선생님께 말을 들으니 당황스럽네요."
이게 무슨.
나조차도 당황스럽다.
카톡
바쁜 알림 소리.
싸-한 마음에 켜본 카톡.
"저 예나엄마인데요.
예나 등원시키면서
아인이도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렸어요."
갑작스러운 폭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예나 엄마가 왜?
남의 일에 참견하는 성격이 아닌데.
갑작스러운 선생님의 전화도 당황 스러윘는데
전해 들은 말은 더 황당했다.
"선생님.
예나 엄마가 왜 그랬을까요?
그럴 성격이 아닌데?
하원길에 아인이가 울긴 했어요.
적응 기간 있어서 아이 달랜 게 끝인데요.
옆에서 그 모습 보고 순간 짠했던 걸까요."
나조차도 의아해 던졌던 반문.
"언니~
아인이가 어린이집 더 있고 싶어 울었잖아요.
어쨌든 같은 반이니
저희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린 거예요.
아이가 더 있고 싶다는데.
왜 안된다는 거예요?"
화까지 내?
내 아이 일에?
몇 개월 전 같이 간 키즈카페에서
아인이의 억울한 상황도 모르는 척했던 사람이?
"그 아이가
아인이 장난감을 먼저 뺏은 거예요.
아인이가 다시 가져온 거고요.
그 아이는 우리 예나 장난감도 뺏더라고요.
예나는 작으니 그냥 뺏고
아인이는 키가 크니 먼저 눈치 보던데요.
근데 나중에 언제 어디서 볼지도 몰라서 말 못 했어요."
차갑고 냉정한 행동에 기가 막혔던 순간들이 잊히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영역인 담임 선생님과의 소통까지 침범해 휘두르고 있었다.
"언니, 아인이가 더 있고 싶어 했잖아요."
예나 엄마는 아인이가 짠하듯 울분을 토했고
예나 엄마의 당당한 화법에 난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곧 알게 되었다.
아인이가 여행의 피로로 일주일 동안 어린이집 등원을 못하는 동안
예나는 혼자서 어린이집에 적응하느라 고생한 거였다.
유난히 가족 위주의 패턴이 익숙했으니
더 힘들어했나 보다.
그리고.
예나 엄마의 시선에서는
아인이가 같이 있으면 예나가 덜 힘들어할 거라 생각했나 보다.
"예나 어머님이
아인이가 왜 한 시간만 하고 집에 가냐고.
예나처럼 낮잠 자고 하원하면 안 되냐고 하셨다는데.
저희 오전에 다 이야기한 거잖아요.
제가 담임인데
다른 선생님께 다른 이야기 들으니 당황스럽네요."
맞혀지는 퍼즐.
그제야 생각이 들었다.
그 울분이 정말
아인을 향한 것이었을까.
힘들어하는
자기 아이를 향한 계산이었을까.
예나가 덜 힘들기 위해 아인이가 곁에 있어야 한다는 이기적인 논리.
키즈카페에서 아인이의 억울함을 외면하던 그 차가움과, 지금 선생님과 내게 화를 내는 뜨거운 울분은
오직 '내 아이의 편안함' 하나였다.
"엄마~
나 이쩨 어린이집 가?
친구들 마나?
선생님두 있쪄?"
아이를 위해 선택했다고 믿은
가정보육이 민망해진 순간.
"오늘은 첫날이라
한 시간만 있다가 올 거야.
재미있게 놀다 와."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는 짧은 길에 수십 번을 말한다.
아이에게 하는 말인지.
나에게 하는 말인지.
아이를 위해 선택했다고 믿은 가정보육이 민망해질 수 있는 건가.
타인의 얇은 이기심에 이토록 쉽게 무뎌지고 있는 순간.
매 번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이다.
누굴 위해서든
가정보육을 선택한 내 다짐이 너무나 쉽게 허무해지고 있었다.
왜 나는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려 애쓰고 있을까.
엄마인 나는 타인의 무례한 참견과 나의 불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아이의 발목을 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최대한 예의를 다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카톡을 보냈다.
"우리 아인이 챙겨줘서 고마워.
하지만 아인이 일은 내가 직접 말할께."
그리고 나는
마음의 셔터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