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서 익어가는 나의 취향

<나이듦의 온도> 시리즈 10 (11)

by 이민자의 부엌

잠시 글을 멈추었던 시간이 있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나는 글을 쓰는 일보다 ‘곁에 머무는 일’에 조금 더 마음을 두고 싶었다. 바쁘게 이어가던 일상의 리듬에서 한 걸음 물러나, 그저 함께하는 시간에 집중해보려는 의도였다. 그렇게 의도적으로 만든 멈춤의 시간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시간은 나이듦의 과정 속에서 ‘쉼’이 지니는 온도를 조용히 체감하게 해주었다.


짧은 일정 속에서도 몇몇 작가님들과 직접 만나 마음을 나누고, 그분들의 책을 선물로 받아오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만남의 여운은 지금도 내 안에 잔잔하게 머물러 있다. 아마도 앞으로의 글 속에서 그 시간은 천천히 풀어내려 한다. 이번 시리즈를 마무리한 뒤에는 한국에서 머물렀던 시간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엮어 새로운 이야기로 이어가려 한다. 낯선 땅에서 익어온 나의 취향처럼, 그 시간들 또한 또 하나의 결로 나를 이루게 될 것이라 믿는다.


다시 글을 이어가는 지금, 그 멈춤의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내면에 스며들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의 흐름이 더욱 또렷해졌다. 그것은 바로 낯선 땅에서 천천히 익어온 나만의 취향에 대한 자각이었다.


캐나다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낯설었다. 언어와 생활 방식은 물론이고, 자연의 풍경마저도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낯선 슈퍼마켓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라 한참을 서성이고, 계산대 앞에서 짧은 인사를 건네는 일조차 긴장되던 순간들이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늘 한 발짝 물러서 있었고, ‘이방인’이라는 감각 속에서 조용히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소리 없이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언어가 완전하지 않아도 먼저 건네는 표정과 태도가 마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낯설던 풍경은 어느새 일상의 일부가 되어갔다. 어느 순간부터 이곳은 더 이상 버텨야 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나의 취향 또한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집 뒤편의 작은 텃밭은 그런 변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처음에는 비어 있는 공간을 채우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이제는 하루의 리듬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상추와 깻잎, 오이와 호박을 심고 가꾸는 일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삶의 속도를 조용히 조율하는 시간이 되었다. 특히 처음 수확한 상추를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날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잎사귀는 단순한 채소가 아니라, 이 땅에서의 삶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된 순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의 취향은 결과보다 과정을 더 소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물론 모든 시간이 따뜻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해에는 김장을 위해 배추를 심고 정성을 들였지만, 수확을 하루 앞두고 갑작스러운 서리로 인해 배추가 모두 얼어버린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힘없이 축 늘어진 배추를 바라보며 느꼈던 허탈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오히려 그 기억이 더 깊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잘 자란 순간보다 무너진 순간이 더 오래 마음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 이후 텃밭은 결과를 기대하는 공간이 아니라, 과정을 받아들이는 공간으로 바뀌었고, 그 변화는 나의 취향에도 그대로 스며들었다.


식탁에서도 비슷한 변화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메뉴판을 읽는 것조차 쉽지 않았고, 낯선 음식 앞에서는 늘 잠시 머뭇거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현지 친구의 집에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나누게 되었고, 내가 가져간 깻잎을 그들이 조심스럽게 맛보던 모습과 나 역시 낯선 음식을 앞에 두고 망설이던 순간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그 어색함은 오래가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익숙함과 낯섦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머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나의 취향은 편안함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조금 더 넓어졌다.


한편으로 이곳에서 더욱 또렷해진 취향도 있다. 된장과 고추장, 청국장과 같은 발효 음식들이다. 한국에서는 늘 곁에 있어 특별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이곳에서는 오히려 더 깊은 의미로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그것들을 직접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재료를 고르고 시간을 기다리며 변화를 지켜보는 과정은 단순한 조리를 넘어, 시간을 함께 살아내는 경험으로 느껴졌다. 백야드 한켠에 놓인 항아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어린 시절 장독대의 풍경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시간의 깊이를 이제야 이해하게 된다.


돌이켜보면, 이곳에서의 시간은 나를 급격하게 변화시키지 않았다. 대신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스며들었다. 텃밭의 작물들이 서두르지 않고 자라나듯, 항아리 속 발효가 묵묵히 진행되듯, 나 또한 그런 흐름 속에서 변화해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익숙해지기 위해 애쓰지 않게 되었고, 현재의 시간에 머무르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결국 나이듦이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온도를 알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빠르지 않아도 괜찮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이해해가는 시간 속에서, 나의 취향은 단순한 기호를 넘어 삶을 지탱하는 방식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지금 이 글을 마무리하는 순간, 나는 또 하나의 이동하는 시간 앞에 서 있다. 한국 시간으로 일요일 새벽, 다시 캐나다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게 된다. 이 글을 읽고 계실 즈음이면 나는 아마 구름 위 어딘가를 지나고 있을 것이다. 매년 반복되는 여정이지만, 이번 한국에서의 시간은 유난히 깊은 의미로 남아 있다. 글로 시작된 인연이 실제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서로의 시간을 내어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경험이 생각보다 더 오래 마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의 취향은 공간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그리고 사람을 통해서도 익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과 사람, 그리고 경험이 쌓여 지금의 나를 조금씩 완성해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서두르지 않는다.
익어가는 것들은 언제나, 조용히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당신의 취향은, 지금 어디에서 익어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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