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의 온도> 시리즈 10 (12)
이제 나는 남은 계절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남은 나의 시간을 함께 떠올리게 된다. 예전에는 계절이 그저 흘러가는 시간의 일부처럼 느껴졌다면, 지금의 나는 그 흐름 속에서 나의 자리를 함께 돌아보게 된다. 봄의 새싹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날도 있고, 가을의 낙엽처럼 조용히 내려앉는 시간도 있다. 겨울의 고요 속에서 마음을 다잡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여름의 긴 햇살 아래에서 이유 없이 마음이 느슨해지는 날도 있다. 그렇게 계절은 늘 같은 자리에서 순환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분명히 달라져 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더 또렷하게 느끼게 되었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나의 시간은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같은 봄은 다시 찾아오지만, 그 봄을 맞이하는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다. 그 단순한 사실이 어느 날부터는 마음 깊은 곳에 오래 머물기 시작했다. 그 생각은 나를 조급하게 만들기보다는,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조금 더 깊이 바라보게 만들었다.
캐나다라는 낯선 땅에서 살아온 시간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낯섦 속에서도 나를 지키는 법, 두려움 속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는 법,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순간 속에서 하루를 견디는 힘을 발견하는 법을 나는 이곳에서 배웠다. 그 모든 경험은 이제 하나의 사건으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간 그 자체가 되어 내 안에 조용히 쌓여 있다.
돌이켜보면 나는 이곳에서 수많은 계절을 건너왔다. 그 계절들은 단순히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나를 조금씩 바꾸어 놓은 시간들이었다. 이민 초기의 겨울은 특히 잊히지 않는다. 끝없이 내리던 눈과 낯선 집 안의 차가운 공기, 그리고 그 속에서 설명할 수 없이 깊어지던 고독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난다.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나는 스스로를 붙잡고 있어야 했고, 그 겨울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그 시절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나는 과연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그 질문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내 안에 머물며 나를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 녹아내린 눈 사이로 올라오는 작은 새싹을 보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장면은 너무도 작고 평범했지만, 이상하게도 내 마음 깊은 곳을 건드렸다.
희망은 거창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작고 조용한 모습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작은 시작이 다시 걸어갈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을.
가을이 되면 나는 공원 길을 천천히 걷는다. 발밑에서 들려오는 낙엽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내 안의 오래된 기억들이 조용히 깨어난다. 한국에서 걷던 골목길과 어머니가 끓여주시던 따뜻한 국물의 온기, 아이들의 작은 손을 잡고 걸었던 어느 날의 오후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 기억들은 때로는 나를 울리기도 하고, 때로는 미소 짓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 기억들은 지금의 나를 붙잡아 주는 힘이 된다.
사람은 살아온 시간으로 버티는 존재이며, 지나온 날들이 지금의 나를 조용히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남은 시간’이라는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예전에는 그저 앞으로 펼쳐질 시간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얼마나 남아 있는지를 함께 생각하게 되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는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고 나는 그 생각 앞에서 한동안 머물러야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남은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더 해야 할까.
그 질문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를 이끌었다. 한때의 나는 해야 할 일과 이루어야 할 목표를 먼저 떠올렸지만, 지금의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나를 자연스럽게 조용한 곳으로 데려간다.
나는 이제 알게 되었다.
남은 시간은 길이가 아니라, 그 시간 속에 어떻게 머무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아무리 긴 시간도 무심히 지나가면 쉽게 사라지지만, 짧은 순간이라도 깊이 머무르면 오래 남는다. 결국 시간은 단순히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남게 된다.
어느 여름 저녁, 해가 길게 남아 있던 날이었다. 나는 집 앞 벤치에 앉아 붉게 물드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 순간은 유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이제는 남은 시간을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그 순간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시간은 붙잡을 수 없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이듦은 단순히 끝을 향해 가는 과정이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가는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불필요한 것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만이 조용히 남는다.
그래서인지 요즘의 나는 예전보다 훨씬 단순해졌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평온을 느낀다. 이민자로 살아온 시간은 나를 더 천천히, 그러나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떠나온 시간과 이곳에서 만들어온 시간, 그 두 개의 시간을 함께 지나왔다. 그 사이에서 때로는 길을 잃기도 했지만, 결국 그 두 시간이 만나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다.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여전히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예전과 달리 나의 감정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나를 이해하려 한다. 그것이 지금의 내가 선택한 가장 솔직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남은 계절을 살아간다. 바람이 차가워도, 햇살이 뜨거워도, 낙엽이 떨어져도, 눈이 내려도 그 모든 순간 속에서 나를 발견하려 한다. 계절은 변하지 않지만, 그 계절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분명히 달라졌다.
조급해하지 않고,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으며,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고 느끼며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것이 나이듦이 나에게 가르쳐준 가장 중요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남은 시간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무엇을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을 내려놓아야 하는지가 이전보다 훨씬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나답게 살아가려 한다.
서두르지 않고, 애쓰지 않으며, 나의 속도로, 나의 방식으로.
그리고 이제는 안다.
이 남은 계절 또한 나이듦의 온도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데워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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