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다듬어준 세상
나는 여전히 손으로 쓰는 걸 좋아한다.
탭이나 노트북보다 다이어리나 메모지에 직접 기록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그날그날의 기분, 감정에 따라 글씨의 모양이 달라지고, 그 필체 속에 내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래서 손글씨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정리되지 않은 글씨가 오히려 내 진짜 마음을 더 솔직하게 드러내주기도 한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가끔 스도쿠 책을 들고 카페로 간다.
그때 어김없이 연필과 지우개가 든 필통도 챙긴다.
한 칸씩 숫자를 채워 넣을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그러던 어느 날, 큰아들이 말했다.
“엄마, 탭에 스도쿠 깔아드릴까요?”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연필이 종이를 스치며 지나는 그 ‘서걱’ 거림, 그 감촉을 이 아이가 과연 알까?
서툰 손에 잡힌 칼로 다칠까 봐, 아침마다 나 대신 연필을 깎아주시던 아빠의 손이 문득 떠오른다.
그 손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단정했다.
작은 필통 속 연필 하나, 지우개 하나도 허투루 두지 않으시던 분.
나는 그저 학교 가기 싫다며 칭얼거리던 어린아이였는데, 아빠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손수 필통을 정리해 주시고, 다듬은 연필을 가지런히 놓아두셨다.
그 뾰족한 연필심처럼, 아빠의 삶도 언제나 정직하고 반듯했다.
아빠는 공무원이셨다.
요즘처럼 컴퓨터로 입력하던 시절이 아니었기에, 모든 서류를 수기로 써 내려가셨다.
호적부, 주민등록부, 각종 행정서류… 빽빽한 글자들 속에도 아빠의 글씨는 한결같이 반듯하고 고왔다.
붓펜, 볼펜으로 써 내려간 그 글씨엔, 아빠의 성품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단 한 줄을 써도 흐트러짐이 없었고, 남의 서류라도 자신의 일처럼 정성 들이시던 분이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아빠의 글씨를 보면 “정말 공무원다우시다.”며 감탄했었다.
나는 어린 마음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단지 글씨가 예뻐서가 아니라, ‘책임감’과 ‘진심’이 담긴 글씨였기 때문이었다.
가끔 나도 연필을 깎아본다.
손끝에 닿는 나무의 결을 느끼며, 어쩐지 아빠의 온기를 따라가게 된다.
예전엔 그저 연필 하나 깎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안다.
아빠가 나를 위해 다듬었던 건 연필이 아니라, 세상을 만나는 내 마음이었다는 걸.
세상이라는 종이에 내 이름이 삐뚤어지지 않게 써 내려가도록, 언제나 곁에서 다듬어주셨던 거다.
연필을 다듬으며 문득 아빠의 냄새가 떠오른다.
비누 향과 잉크 냄새, 그리고 퇴근 후 묻어나던 먼지 섞인 바람 냄새.
나는 그 냄새가 세상에서 제일 좋았다.
무릎 위에 앉아있으면,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고, 그 손끝의 온기가 마음까지 따뜻하게 만들곤 했다.
그 온기가 아직도 내 손끝에 남아있는 것 같다.
어쩌면 내 삶의 방향을 정해준 나침반 같은 온기였는지도 모른다.
아침마다 엄마가 묶어준 긴 머리를 쓰다듬으며, “오늘은 노란 리본이 어울리겠다.” 하시던 아빠.
그 크고 진지한 눈매로 내 얼굴을 바라보시던 순간이 선하다.
아빠의 손길에는 늘 말보다 깊은 사랑이 있었다.
말수는 적으셨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깊은 울림을 주셨는지…
그땐 몰랐다.
그 다정함이, 그 시선이, 그 침묵이 모두 사랑이었다는 걸.
시간이 흐르고 나도 어느새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제야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자식이 다치지 않기를, 서툰 세상살이 속에서도 단단히 설 수 있기를 바라며 매일 연필을 깎던 그 마음.
나도 매일 같은 마음으로 아들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알까?
이 마음을, 이 그리움을, 그리고 그때의 아빠처럼 나 또한 매일 가슴속에서 깎아내는 사랑의 모양을.
푸른 새벽,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본다.
하늘이 아직 잠 깨지 않은 듯 희미하게 빛난다.
그 푸른빛 속에 아빠의 미소 띤 얼굴이 겹쳐 보인다.
“오늘도 잘 지내니?” 하실 것만 같다.
나는 속으로 대답한다.
“응, 아빠 덕분에 괜찮아요.”
그 말이 목구멍에서 자꾸만 뜨거워진다.
쓰다 보니 아빠가 참 많이 보고 싶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아빠의 손길과 목소리, 그리고 그리움은 잊히지 않는다.
그리움은 늘 새벽을 타고 찾아온다.
푸른 새벽 공기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아빠를 부른다.
“아빠, 거기선 편안하시죠?”
그리고 맑은 태양빛으로 아빠의 대답을 듣는다.
“그래, 우리 딸. 괜찮다. 너는 잘하고 있어.”
그리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양을 바꿔 마음속에 자리 잡는다.
연필의 나뭇결 속에도, 새벽의 공기 속에도, 내 아이의 웃음 속에도 아빠는 살아 있다.
그렇게 아빠는 여전히 내 곁에 계신다.
그리움이 동트는 이 새벽에, 나는 아빠의 따뜻한 미소를 꺼내어 마음 한편에 곱게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