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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에 대하여

우리가 숨기고 싶었던 실패의 얼굴

by 구시안


패배는 언제나 예고 없이 찾아온다.

그것은 종종 실패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우리 삶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린다. 우리는 승리를 위해 달려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은 대개 패배의 순간이다. 박수와 환호 속에서는 자신을 성찰할 틈이 없지만, 고개를 숙이는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다.



패배는 결과이기 이전에 감정이다.

그것은 무력감이며, 수치심이며,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다. 우리는 패배했을 때 자신이 부족하다는 사실보다, ‘부족한 나를 들켜버렸다’는 감각에 더 괴로워한다. 타인의 시선, 사회가 정해 놓은 기준, 그리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는 조용한 판결.



패배는 그렇게 우리를 침묵하게 만든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보자면 패배는 단순한 상실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성의 붕괴가 아니라, 가능성의 재배치다. 우리가 실패했다고 믿는 순간, 사실은 하나의 길이 닫혔을 뿐이다. 그 닫힘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다른 문들이 존재함을 드러낸다. 문제는 우리가 그 문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오래 고개를 숙이고 있는가이다.



니체는 인간을 ‘극복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여기서 극복이란 타인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어제의 자신을 넘어서는 일에 가깝다. 그렇다면 패배란 무엇인가. 그것은 극복의 과정에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어두운 복도다. 그 복도는 길고, 춥고, 혼자 걷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안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결코 이전의 자신을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종종 패배를 부끄러워 숨긴다.

이력서에서 삭제하고, 대화에서 생략하고, 기억 속에서도 애써 지우려 한다. 하지만 삶은 묘하게도, 우리가 숨긴 패배의 크기만큼 우리를 얕게 만든다. 반대로, 패배를 직면한 사람은 깊어진다. 그 깊이는 말투에, 시선에, 그리고 타인의 아픔을 대하는 태도에 스며든다.



패배의 경험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든다.

더 정확히 말하면, 겸손해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세상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 노력과 결과가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냉정한 진실을 배운 사람은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공을 자랑하지 않고, 실패를 조롱하지 않는다. 이미 패배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문학 속에서 패배한 인물들은 언제나 인상적이다.

그들은 영웅이 아니며, 완벽하지도 않다. 오히려 좌절하고, 방황하고, 때로는 비겁한 선택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는 분명하다. 패배한 인물들은 인간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서 있기 때문이다. 승리한 인간이 이상이라면, 패배한 인간은 현실이다.



삶에서의 패배는 종종 ‘끝났다’는 감각을 동반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돌아보면, 그 패배는 끝이 아니라 방향 전환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실패라고 불렀던 순간은, 삶이 우리에게 다른 언어로 말을 걸었던 장면일지도 모른다. “이 길은 아니다”라는, 다소 무뚝뚝하지만 정직한 조언.



패배 이후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패배의 가장 큰 선물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되는 지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 그리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근육. 이 모든 것은 승리의 연속 속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는 여전히 승리를 원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며, 나쁜 욕망이 아니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겼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패배의 순간에 쓰인다.



그러므로 패배를 너무 서둘러 극복하려 하지 말자.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흔들리고, 충분히 생각하자. 패배는 서둘러 잊을 대상이 아니라, 천천히 이해해야 할 경험이다. 그 시간을 통과한 사람만이, 다음 승리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패배는 우리를 부수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를 다시 빚기 위해 온다.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너그러우며, 조금 더 인간적인 존재로.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또다시 넘어지게 되더라도, 그때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패배는 끝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허락한 또 하나의 깊어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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