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무게로 살아가는 시간들
평등이라는 말은 대체로 밝다.
선언처럼 또렷하고, 구호처럼 간결하다. 그러나 그 말이 실제로 닿는 자리는 생각보다 좁다. 어떤 삶의 구석에는 그 단어가 도착하기도 전에 힘을 잃는다. 마치 햇빛이 들지 않는 골목처럼, 그곳에 자리하여 얼어붙은 작은 호수같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에서는 평등이라는 말이 의미가 아니라 소음이 된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기회는 공평하다”고. 과연 그럴까.
기회는 언제나 맥락을 타고 온다.
기회를 알아볼 수 있는 언어,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체력, 기회를 놓쳐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안전. 이 모든 것이 갖춰져 있을 때만 기회는 ‘공평한 것’처럼 보인다.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나쳐 가는 것이다.
평등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부담이다.
같다는 말은 안도감을 주지만, 같아야 한다는 기대는 곧 압박이 된다. 같이 출발했다는 믿음 속에서
뒤처진 사람은 설명을 요구받고, 멈춘 사람은 변명을 강요받는다.
평등이라는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내가 부족한 걸까.” 이 질문은 구조를 향해야 하지만 대개는 마음속으로 되돌아온다. 문학적으로 보면, 이 사회는 너무 많은 결론을 서둘러 쓰고 있다. 삶은 아직 진행 중인데 우리는 중간 페이지마다 평가를 남긴다.
이 사람은 성공, 저 사람은 실패. 그러나 인간의 내면은 결과로 요약되지 않는 서사로 가득하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간 속에서 사람은 가장 크게 변형된다.
그 시간들은 통계에 잡히지 않고, 이력서에 기록되지 않으며, 대화 속에서조차 생략된다. 철학적으로, 평등이 닿지 않는 자리는 인간을 추상으로 취급하는 순간부터 만들어진다.
누구나 읽어 봤던 글귀 “모든 사람은 동일하다”는 말은 아름답지만 위험하다.
그 문장이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순간, 차이는 예외가 되고, 예외는 설명의 대상이 된다.
설명해야 하는 삶은 늘 피곤하다.
왜 늦었는지, 왜 못했는지, 왜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는지. 설명은 곧 방어가 되고, 방어가 반복되면 사람은 점점 자기 삶을 부끄러워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시적인 언어가 필요해진다.
시는 결론을 미루는 언어다. 판단하지 않고, 단정하지 않으며, 잠시 머무르게 한다. 평등이라는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시는 말한다. 여기도 삶이라고. 여기도 시간이 흐르고, 여기도 감정이 자라고, 여기도 사람이 숨 쉬고 있다고.
심리적으로 가장 취약한 순간은 자기 고통을 합법적으로 말할 수 없다고 느낄 때다.
“그래도 너는 낫잖아”라는 말은 비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은 감정의 자격을 박탈하는 문장이다.
고통은 상대적이지 않다. 다만 조건이 다를 뿐이다.
조건이 다른 고통들을 하나의 저울에 올리는 순간, 누군가는 늘 침묵하게 된다.
평등을 말하는 사회일수록 더 정교한 불평등이 숨어 있다.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말해지지 않으며, “이미 공평한데 왜 불만이냐”는 문장으로 봉인된다. 그 봉인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삶을 설명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설명해도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학습 끝에. 평등이라는 말이 닿지 않는 자리는 늘 조용하다.
분노도, 항의도 크지 않다.
다만 사람들의 말수가 줄어들고, 꿈이 작아지고, 기대가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축소된다. 이것이 가장 심리적인 형태의 좌절이다.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접히는 것. 그래서 필요한 것은 모두를 같은 자리에 세우는 정의가 아니라, 각자의 자리를 함부로 재단하지 않는 태도다.
누군가의 속도를 묻기 전에 그 사람이 짊어진 무게를 상상하는 일.
도착을 축하하기 전에 통과의 시간을 인정하는 일. 그것은 제도를 바꾸지 못할 수도 있지만, 적어도 사람의 마음을 덜 상처 입힌다.
평등은 이상이다.
그러나 삶은 이상보다 먼저 조건을 만난다. 그 조건을 무시한 평등은 오히려 또 다른 불평등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묻지 말아야 할 질문을 하나쯤 배워야 한다. “왜 아직 거기 있느냐”가 아니라
“거기서 어떻게 버텨왔느냐”를.
평등이라는 말이 닿지 않는 자리에서 여전히 사람들은 살고 있다.
말해지지 않은 노력과 보이지 않는 싸움과 아무도 박수치지 않은 하루들로.
그 자리를 상상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평등은 구호가 아니라 윤리에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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