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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보다 먼저 왔던 감정

우리가 증오라고 부르기 전에 이미 다치고 있었던 마음에 대하여

by 구시안


미움은 언제나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다.
그것은 감정의 출발점이 아니라 종착점에 가깝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관계가 끝났을 때, 혹은 마음이 돌아섰을 때 “미워졌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 말 앞에 훨씬 더 오래된 감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미움보다 먼저 왔던 감정은 대개 아주 조용하다.
기대였고, 믿음이었고, 설명받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받고 싶다는 간절함이었다.



심리학에서 미움은 일차 감정이 아니라 이차 감정으로 분류된다.
그 아래에는 반드시 상처, 실망, 좌절, 수치 같은 더 연약한 감정들이 깔려 있다. 우리는 그 연약함을 드러내는 대신 미움이라는 단단한 감정을 선택한다. 그 편이 덜 부끄럽고, 덜 약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움은 종종 자기 보호의 언어처럼 기능한다.
“더 이상 기대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다시 다치지 않겠다”는 약속처럼.



그러나 마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미움이 생기기 전, 우리는 이미 오래 기다리고 있었다.

변하길 기다렸고, 알아주길 기다렸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원래 저런 사람일 거야.” “내가 예민한 걸 수도 있어.” “조금만 더 참아보자.” 이 문장들은 모두 미움 이전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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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56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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