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하얀 것
설원은 언제나 소리보다 먼저 마음을 잠재운다. 눈이 내린 자리는 모든 흔적을 지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발자국은 잠시 남았다가 이내 흐려지고, 말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공기 속에서 식어버린다. 그날의 설원도 그랬다. 아무도 듣지 않을 것 같았고, 그래서 오히려 무엇이든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눈은 세상을 하얗게 덮었지만, 그 하얀색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오래 눌러온 감정의 표면 같았다. 차갑고 평평한 얼굴을 하고 있으나, 그 아래에는 분명 시간이 쌓여 있었다.
사람은 왜 그런 곳에서 목소리를 높이게 될까. 도시에서는 결코 부르지 않을 이름을, 평소에는 꺼내지 않을 안부를. 설원은 대답하지 않기 때문에 안전하다. 메아리조차 희미한 공간에서 말은 상처가 되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마음은 잠시 솔직해진다. 눈밭 위에 서서 외친 한 문장은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에게서 빠져나오기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으면 얼어붙을 것 같았고, 외치지 않으면 영영 묻혀버릴 것 같았다.
하얀 풍경 속에서 사람은 작아진다. 몸은 그대로인데 존재감만 줄어든다. 그 축소된 크기만큼 기억은 또렷해진다. 함께 걷지 못했던 시간, 건네지 못한 말, 너무 늦게 알아차린 마음들이 설원 위에서 하나씩 떠오른다. 눈은 아무것도 붙잡지 않지만, 기억은 도망가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텅 빈 곳에서야 비로소 붙잡힌다. 바람이 세게 불수록 생각은 더 깊어지고, 추울수록 감정은 선명해진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