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늦게 도착하는 도시에서 사유가 걷는 방식
서울의 봄은 너무 빨리 웃었다. 꽃은 피었고, 사람들은 더 바빠졌다.
햇빛은 충분했지만 숨 쉴 틈은 없었다. 모든 시작이 성과처럼 재촉받는 계절 나는 피지 못한 마음을 안고 개화 대신 이탈을 택했다. 봄이 나를 밀어낼 때 나는 조용히 도시를 벗어났다.
핀란드의 봄은 서두르지 않는다.
이곳의 봄은 도착이라기보다 해빙(解氷)에 가깝다. 계절이 바뀌었다고 선언하지 않고, 얼어 있던 것들이 조용히 자기 자리를 풀어놓는 방식으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눈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낮아지고, 얇아지고, 투명해진다. 남아 있는 흰색은 계절의 잔재가 아니라, 시간을 견뎌온 흔적처럼 보인다. 한 때 시끄럽게 기억되었다가 흩어지는 유행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견딘 고요하고 아름다운 고전처럼 느껴졌다.
크루누하카를 걷는다.
회색의 코블스톤 바닥. 규칙적이지만 완벽히 정렬되지 않은 돌의 결. 그 사이사이 스며든 어둠과 습기감은
이 도시를 말해주고 있었다. 핀란드의 도시는 대체로 말이 없다. 대신 숨이 있다. 낮은 건물들 사이로 나무들이 고개를 내밀고, 유리창에는 겨울 동안 모아둔 침묵이 아직 남아 있다. 사람들은 조용히 걷는다. 급하게 어딘가로 향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걷는다는 것은 이동이 아니라 사색의 형태에 가깝다. 발걸음은 목적보다 리듬을 따른다.
크루누하카 거리의 신발.
버릇처럼. 새로운 여행길에 새로운 신발을 사신었다. 시간속에 쌓인 무거운 지난 흔적은 벗어버리고 새 신을 신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유에서. 어느 오랜된 구두가게 들려 검정 구두 한 켤레를 사신었다. 가장 나의 살갗에 잘 붙는 구두를 골랐다.
크루누하카 거리는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게의 간판은 몇 해째 바뀌지 않았고, 벽에 붙은 전단지는 계절이 지나도 색만 바래갔다. 그 거리에서 가장 자주 바뀌는 것은 사람보다 신발이었다. 나는 그 거리에서 오래 멈춰 서 본 적이 없다. 항상 지나가는 쪽이었다. 신발은 목적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얼마나 오래, 얼마나 자주 이 길을 밟아왔는지만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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