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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싹한

보지 않기로 선택된 자유

by 구시안

기상예보가 기가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날도 있다니. 가장 거짓말쟁이였던 기상예보가 진실을 토해낸 날. 눈이 내린다.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기묘한 일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은 때때로 따뜻함이 아니라 서늘함으로 먼저 다가온다. 앞집 베란다에는 새벽녁 실루엣만 보이는 흡연하는 이름도 얼굴도 모를 친구가 있었다. 누군지 관심도 없지만, 같은 새벽녁. 같은 시간. 같이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다는 사실이 기묘할 뿐이다. 숨을 쉰다는 건 공기를 들이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세계가 나를 통과하도록 허락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그 순간마다 나는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그 인식이 바로 오싹함이다.


사람들은 선택한다고 믿지만, 선택 이전에 이미 던져져 있다. 아침은 오고, 잠을 잘 자건, 못자건 상관없이 몸은 일어나며, 생각은 허락 없이 시작된다.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늘 한 박자 늦다. 세상은 설명 없이 존재하고, 나는 그 설명 없음 앞에서 책임을 떠안는다. 이 불균형, 이 부조리한 공백이 등을 타고 내려오는 냉기처럼 남는다. 뭐든 시간을 재거나 시달리는 건 이제 질색이다. 생각이 자유롭고 거짓말 안하는 기상예보를 바라지만, 나는 아직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글을 쓴다. 기상예보는 틀려도 좋다.


사람들과 마주할 때마다 나는 그들의 시선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본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나. 그 시선은 나를 규정하고, 나는 그 규정에 저항하면서도 동시에 기대어 선다. 자유는 축복이 아니라 형벌에 가깝다. 아무도 대신 선택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실이 나를 오싹하게 만든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사랑도, 신념도, 도덕도 결국은 내가 붙잡은 해석일 뿐이다. 그것들이 무너질 때 드러나는 것은 공허가 아니라 책임이다. 나는 내 삶의 저자이지만, 초고를 쓸 시간도 없이 원고를 제출해야 하는 처지다. 수정은 가능하지만, 지워진 문장은 돌아오지 않는다.


밤이 깊어질수록 생각은 더 또렷해진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 그러나 지금 당장 오지 않는다는 사실. 그 애매한 거리감이 삶을 지속시키는 동시에 불안하게 만든다. 우리는 끝을 알기 때문에 걷고, 끝을 알기 때문에 멈춘다. 이 이중성 속에서 하루가 또 지나간다.


오싹함은 공포가 아니다. 그것은 깨어 있음의 증거다. 내가 여기에 있고, 아무도 나를 대신해 살아주지 않으며, 이 순간이 다시 오지 않는다는 인식. 살아간다는 것은 그 오싹함을 외면하지 않고 견디는 일이다. 의미는 나중에 만들어진다. 지금은 단지 존재할 뿐이다.




사람들은 사실 보지 못하는 것들로 하루를 채운다. 보지 못했기 때문에 괜찮다고 믿는 것들, 보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용서한 순간들. 눈앞에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라졌다고 착각한 수많은 장면들이, 사실은 우리 삶의 배경음처럼 계속 재생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잊으며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체계적이다. 우리는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정리하고, 마음속 서랍에 라벨을 붙인다. 실패, 미안함, 지나친 친절, 말하지 못한 농담. 하지만 그 서랍은 자주 저절로 열린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날, 전혀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그래서 인생은 가끔 농담처럼 느껴진다.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종류의.


사람들은 중요한 것보다 편리한 것을 더 잘 기억한다. 비밀번호는 잊어버려도 상처 준 말은 오래 남는다. 반대로, 누군가의 친절은 쉽게 희미해진다. 아마도 세상은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지도 모른다. 고통은 선명하게, 온기는 흐릿하게. 공평하진 않지만, 익숙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그 문장은 마법처럼 작동해서 책임을 잠시 사라지게 만든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단지 보이지 않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다른 형태로 우리를 따라다닌다. 그림자처럼, 또는 오래된 농담처럼.


그래서 살아간다는 건, 잊었다고 믿는 것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일이다.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고 안심하면서, 사실은 늘 거기 있다는 걸 어렴풋이 느끼는 상태.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아,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순간이 온다. 특별한 깨달음은 아니다. 그냥 인생이 원래 이런 식이었다는 확인일 뿐이다.


그러니 너무 많은 것을 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너무 완벽하게 기억하려 들지도 말자. 우리는 어차피 보지 못하고, 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간다. 이상하게도, 바로 그 점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그리고 가장 편안한 밤이 물든다. 오싹한 날씨에 오싹한 생각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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