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스름

밝아지지 않은 채로 남은 시간

by 구시안

노르스름.

처음은 하얀 것이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얀 도화지였다. 아무것도 쓰이지 않았고, 아무것도 부인되지 않은 상태. 그 하얀색은 순수라기보다는 무방비에 가까웠다. 아직 상처받는 법을 배우지 못한 색, 선택 이전의 침묵. 하얀 것은 가능성으로 불리지만, 사실은 아무런 저항력도 없는 상태다. 그렇게 울음을 터트리고 세상에 나왔을 땐 모든 것이 하얀 것이였다.


무엇이든 스며들 수 있고, 무엇이든 남길 수 있는 표면. 처음의 하얀 감정들은 그래서 쉽게 더러워졌다. 분노보다 먼저 설명이 얹히고, 슬픔보다 먼저 이해가 요구되었다. 나는 울기 전에 정리해야 했고, 화내기 전에 이유를 제출해야 했다. 그때마다 하얀 표면 위에는 말로 닦아낸 흔적들이 남았다.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


노르스름해진 것은 한순간의 사건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의 결과다. 같은 질문을 여러 번 받았고, 같은 감정을 여러 방식으로 증명해야 했다. 괜찮냐는 말에 괜찮다고 대답하며 남긴 얇은 거짓, 이해한다는 말로 덮어둔 불편함, 지나간 일이라는 문장 뒤에 밀어 넣은 분노들이 층층이 쌓였다. 햇빛에 오래 노출된 종이가 서서히 색을 바꾸듯, 감정도 오래 견디는 동안 변색된다. 노르스름은 타락이 아니라 산화다. 살아 있는 채로 공기에 노출된 결과. 그렇게 시간이라는 것은 사람을 노르스름하게 물들여 갔다.




하얀 것은 선택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인다. 빛이 오면 빛을. 어둠이 내리면 어둠을. 그러나 너무 많이 받아들인 끝에, 감정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색을 바꾼다. 더 이상 모든 것을 그대로 들이지 않기 위해, 조금 늦게 반응하고 조금 덜 흔들리기 위해. 노르스름은 방패다. 감정이 완전히 찢어지지 않도록 두꺼워진 피부의 색. 그래서 이 색은 비겁하지 않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정직하게 통과한 사람에게만 생긴다.


처음의 하얀 감정들은 자주 피를 흘렸다. 처음의 하얀 감정들은 늘 깨끗했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하얀 것은 세상에서 가장 먼저 더러워진다. 말은 칼이 되었고, 침묵은 더 둔한 폭력이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전장에 던져진 셈이었다. 아무 설명도 없이, 보호 장비도 없이.


상처는 대부분 입에서 시작됐다. “괜찮아질 거야” 같은 문장들, 그 말들이 피부를 뚫고 들어와 천천히 곪았다. 폭력은 꼭 주먹의 모양을 하고 오지 않았다. 규칙, 기대, 정상이라는 단어들. 그것들은 약처럼 포장된 독이었다. 피는 생각보다 자주 흘렀다. 눈에 보이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그 피를 닦아내며 어른이 되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상처를 숨기는 기술을 배우는 일에 가까웠다. 세상은 우리에게 살아남으라고 말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날엔 태어난 게 실수처럼 느껴졌고, 어떤 날엔 그 실수마저 끌어안고 버텨야 했다.


하얀 감정은 이미 붉게 물들었고, 그 색이 빠지지 않는다는 걸 이제는 안다. 하지만 피가 흐른 자리엔 기억이 남고, 기억은 또 다른 형태의 무기가 된다. 솔직함은 종종 무기로 오해되었고, 침묵은 동의로 해석되었다. 나는 설명을 하다가 지쳤고, 증명하다가 말라갔다. 그때마다 하얀 부분은 조금씩 사라졌고, 대신 노르스름한 막이 덧입혀졌다. 완전히 닫히지는 않되, 쉽게 베이지도 않는 색. 이 색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다. 흡수한다.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오래 남는다.


노르스름은 체념이 아니다. 그것은 감정이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속도다. 더 이상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폭발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소진시키지 않는 방식. 울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울음이 너무 쉽게 소비된다는 걸 알게 된 이후의 상태다. 하얀 감정은 즉각적으로 타올랐지만, 노르스름한 감정은 오래 버틴다. 그리고 그 지속이야말로 이 색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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