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림이 무게를 풀어놓는 순간
겨울의 대나무숲은 술이 덜 깬 새벽처럼 차가웠다. 눈은 하늘에서 조용히 내려와 대나무의 마디마다 얹혔고,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한 줄기들이 바람에 맞춰 몸을 흔들었다. 그때 나는 소리를 들었다.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서로 부딪히며 내는 맑은 금속성의 울림, 청아하지만 날이 선 음, 마치 오래된 병 속에 갇혀 있던 공기가 한꺼번에 빠져나오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는 자연의 음악이라기보다 생존의 언어에 가까웠다.
늦은 밤. 달리기 시작한 자동차 안에 소리는 정직했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달리다 들린 휴계소에서 뜨거운 물을 부어 컵라면 하나를 들이킨다. 컵라면이 이렇게 맛있었나. 그렇게 대나무 숲으로 가는 길이 멀더라도 꽤 든단한 온기가 흉통안에 자리잡는 듯 했다. 이정도 연료면 충분하다고.
숲길은 길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솔직했다. 인공적인 배려가 없었고, 발자국은 잠깐 남았다가 곧 지워졌다. 눈 위를 밟을 때마다 발밑에서 사소한 저항이 일어났고, 그 저항이 오히려 나를 현실에 붙잡아 두었다. 머릿속은 오래된 신문처럼 잔뜩 젖어 있었고, 생각들은 무겁게 서로 엉겨 붙어 있었다. 나는 그 무게를 끌고 숲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도망치듯이, 혹은 심문받듯이.
바람이 한 번 세게 불었다. 대나무들은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일어섰다. 그 움직임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굽혀야 할 때 굽히고, 다시 설 때는 곧게 선다. 인간이 평생 배우지 못하는 태도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느슨해졌다. 이름 붙이지 못한 생각들이 마디 사이로 빠져나가듯 흩어졌다. 랭보가 말했을 법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감각이 사고보다 먼저 도착했고, 나는 생각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가벼워지고 있었다.
눈은 계속 내렸고, 대나무의 어깨 위에서 천천히 미끄러졌다. 떨어지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작은 결정처럼 반짝였고, 그 빛은 화려하지 않아서 더 잔인했다. 숲은 위로하지 않았다. 술 취한 친구처럼 등을 두드리지도, 어느 영화였나. 책이었나.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 어디선가 보았던 “인생은 원래 엿 같아”라고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저 계속 서 있었고, 흔들렸고, 소리를 냈다. 그 무심함이 오히려 나를 가볍게 하고 있었다.
걷다 보니 몸이 먼저 변했다. 어깨가 내려가고, 숨이 깊어졌다. 무거웠던 것은 삶이 아니라, 삶을 붙들고 있던 나의 태도였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대나무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다. 잎은 떨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고, 줄기는 부러질 각오로 서 있었다. 그 결연함이 가벼움을 만들고 있었다.
숲길의 끝에 다다를 즈음,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정리하려 들지 않았다. 이해도, 결론도 필요 없었다. 머리는 비어 있었고, 몸은 눈보다 가벼웠다.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그 청아한 소리는 오래 남지 않았지만, 충분했다. 어떤 순간은 설명되지 않아야 더 정확해진다. 나는 그날, 겨울의 대나무숲에서 아무것도 얻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것을 내려놓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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