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짐

생각해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들

by 구시안

처음엔 잘 드는 칼이었을 것이다. 모든 감정은 처음엔 날이 선다. 손에 쥐는 순간부터 피가 날 것 같은 것. 그래서 사람은 조심한다. 조심하다가. 견디다가. 어느 날 문득 베이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 그게 무뎌짐이다. 무뎌진다는 건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너무 많이 느낀 뒤에 느끼는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울음이 늦게 도착하고 분노가 방향을 잃고. 기쁨이 잠시 머뭇거리다 지나간다. 사람은 멀쩡해 보인다. 말은 정확하고 웃음은 제자리에 있고 하루는 문제없이 흘러간다. 다만 내부에서는 감정이 제때 도착하지 않는다. 택배처럼 늦게 온다.


사회에 나와 사람을 마주하고 미팅을 하는 시간이나, 면접을 보는 시간을 나는 사실 제일 싫어한다. 자기자랑이 난무하는 사람을 마주하면 나는 이미 무뎌져 있다. 처음에는 놀라거나 불편하고 화가 날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최대한의 예의를 억지로 붙잡고, 웃음을 억누르며, 그 사람이 던지는 말들을 다 듣는다. 이미 자랑만 난무한 확인되지 않는 인포메이션은 필요없다. 나를 바라보며 자신을 어필하고 있는 혓바닥에는 수정테이프가 붙어있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예전 홍현희라는 개그우먼이 출현한 웃찾사의 "더 레드"라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코너가 좋았다. 풍자도 있으면서 풍성한 깃털 부채로 자랑만 나불대는 상대의 주둥이를 쳐대며 뱉는 그녀의 솔직한 멘트들이 사람들을 대신해 속시원하게 할 말을 해주고 있었기에 인기가 많았던 것이다. 대리만족 말이다. 스스로는 뱉지 못하는 말들은 일상속에 천지빼까리다. 그것은 사람마다 달라서 참거나 뱉거나이다.


나는 말이 많은 사람을 싫어한다. 자신의 말만 하고 상대의 말은 들어 줄 생각이 1초도 없는 사람을 만날 때면, 말 속에서 나는 이미 지쳐버린다.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나는 그 속에서 점점 작아진다.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의 성취, 그의 능력, 그의 끝없는 자기애. 모두 종이 위에 쓴 글자처럼 가볍게 흩어진다. 나는 확인 되지 않은 것은 믿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예의를 지키기 위해,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이유, 어쩌면 내가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인지 모르겠다. 미팅은 끝나고, 시간은 십여 분 더 그의 자기자랑과 혼잣말에 잠식된다. 나는 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마음속에서는 이미 떠날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결국,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선다. 그리고 시원하게 청량하고 차가운 하늘을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뒤에서 메아리치지만, 나는 이미 거리를 벌였다. 그의 말은 내게 남지 않는다. 내 안에서, 그것들은 무뎌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날카롭지도, 자극적이지도 않다. 나는 내 발걸음을 느끼며, 이미 다른 세계로 들어간다. 그의 이야기 속에 갇혀 있던 나의 신경들은 서서히 원래의 온도를 찾는다. 차갑고, 깔끔하게. 그는 여전히 말하고 있지만, 나는 이미 듣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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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못한 감정과 쉽게 합의된 문장들 사이를 기록합니다. 빠른 공감보다 오래 남는 문장을 쓰고자 합니다. 내면을 중요시 여기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 73일째 거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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