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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산책

by 구시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단어 '인생'.

새벽녘 달무리를 보며 쓰는 글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있는 밤. 인생이라는 단어가 파고들었다. 이제 겁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나이. 어느 순간부터 산책처럼 생각하기로 하면서 펼쳐진 일상 속 지독했던 이야기들이 가득 들은 보따리장수가 되어 있으니, 이것을 팔아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산책 중인 것처럼 위장을 하고서.


산책을 하다가 어느 마을 한복판에 떡하니 펼쳐 놓고 글을 파는 장수가 되어버리는 것처럼. 낮과 밤 눈을 뜨고 문장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내 글이 팔만한 물건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들의 글을 비교해 보면서. 그리고 식어버린 커피를 수채통에 비워버리고, 외투를 입고 깊은 밤 산책을 나선다. 어차피 산책이다. 모든 것이. 여전히 작가라는 말은 부끄러울 지경이다.


나는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목적지는 늘 걸음보다 늦게 도착하는 법이니까. 발이 먼저 나가고, 생각은 그 뒤를 따라온다. 인생도 그런 식으로 흘러왔다. 이해는 항상 한 박자 늦었다.


길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러나 특별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는 늘 무언가를 느껴야 한다고, 의미를 붙여야 한다고 배워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날의 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길이 아니라 나 자신을 듣기 시작했다.


사람은 걷는 동안 가장 솔직해진다. 멈춰 서 있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고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숨은 일정하지 않았고, 생각은 문장이 되지 못한 채 흩어졌다. 그 흩어짐 속에서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나는 나를 설명하느라 너무 오래 서 있었다는 것을.


인생은 질문을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느껴지기를 원할 뿐이다. 그러나 나는 늘 묻기만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나는 항상 한 발 늦는지. 질문은 나를 똑똑하게 만들었지만, 살아 있게 하지는 못했다.


산책을 하다 보면 갑자기 오래된 내가 튀어나온다. 이미 지나간 선택들, 말하지 않은 말들, 그때는 몰랐던 감정들이 갑작스럽게 현재의 나를 붙잡는다. 나는 그것을 기억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기억은 너무 정돈된 단어다. 그것은 오히려 아직 끝나지 않은 감각에 가깝다.


나는 내 삶이 명확해지기를 원했던 적이 있다. 분명한 이유, 분명한 방향, 분명한 나. 그러나 명확함은 언제나 숨을 막히게 했다. 모호함 속에서만 나는 계속 움직일 수 있었다.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길가의 나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 나무는 왜 저 자리에 서 있는 걸까. 답은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모든 것에 답이 있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순간, 세상은 조금 덜 위협적으로 보였다.


인생은 산책과 닮아 있다. 성과를 요구하지 않고, 완성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계속 발을 내딛고 있는 상태를 허락한다. 멈추면 그것은 산책이 아니라 체류가 되고, 체류는 곧 두려움으로 변한다. 나는 나를 바꾸겠다고 결심한 적이 많았다. 그러나 산책을 하며 알게 되었다. 인생은 결심으로 바뀌지 않는다. 인생은 조금씩 다른 리듬으로 걷다 보면 어느새 달라져 있는 것이다. 변화는 선언이 아니라 누적이다.


어느 순간 나는 내가 외롭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러나 그 외로움은 나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외로움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금 너는 너와 함께 걷고 있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위로가 되기도 하였. 산책의 끝에서 나는 특별한 깨달음을 얻지 않았다. 다만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생이 꼭 이해되지 않아도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본다고 해서 길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인생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다. 우리가 다시 걷기를 기다리면서.




저녁은 늘 조용히 무너진다. 해가 산등성이에 기대어 숨을 고르면, 하루는 아무 말 없이 스스로를 접는다. 우리는 그 접힌 자리 위에 앉아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의자, 특별할 것 없는 침묵. 그러나 침묵은 늘 사소한 것들을 크게 만든다. 컵 가장자리에 남은 미지근한 물자국, 창문에 남아 있던 손바닥 자국, 말하지 못한 문장의 그림자 같은 것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른다고들 말하지만, 저녁의 시간은 가끔 옆으로 흐른다. 기억과 기억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며, 잊었다고 믿었던 얼굴을 다시 데려온다. 그 얼굴은 늘 조금 느리게 웃고, 조금 늦게 사라진다. 우리는 그 느림을 오해해 왔다. 느림은 미련이 아니라, 충분히 바라보려는 태도였다는 것을.


사람은 하루에 몇 번이나 자기 자신을 지나친다. 거울 앞에서, 이름을 불릴 때, 혹은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철렁 내려앉을 때. 그때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된다. 가장 용감한 나, 가장 비겁한 나, 그리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은 채 서 있는 나. 산다는 것은 그 셋이 번갈아가며 펜을 쥐는 일인지도 모른다.


눈이 오면 도시는 잠시 솔직해진다. 아스팔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발자국을 기억하고 있는지 드러내고, 가로등은 빛을 과장하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도 마찬가지다. 우산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조금 더 쉽게 내준다. 비는 이유를 묻지 않기 때문이다. 이유를 묻지 않는 존재 앞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기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떤 날은 말보다 숨이 필요하다. 설명보다 기다림이 필요하다. 그럴 때 마음은 오래된 책처럼 펼쳐진 채로 남아 있고, 바람은 페이지를 넘기지 않는다. 그 정지의 순간에 우리는 알게 된다. 삶이 우리를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너무 서둘러 읽어왔다는 사실을.


밤이 깊어지면 별은 자신이 빛난다는 것을 잊은 듯 가만히 있다. 빛은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기 위해 존재한다는 듯이. 사람도 그렇다. 누군가의 밤을 밝히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어둠을 견디는 것만으로 충분한 날이 있다. 그날의 우리는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살아 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하루는 다시 시작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어제의 저녁이 오늘의 걸음을 조금은 다르게 만들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변화야말로 가장 깊은 변화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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