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와 남자, 휴일의 아침부터
나는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달팽이 같은 여자가,
한 남자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나쯤은 비극을 품고 산다지만,
유일한 비극은 스스로를 비극적 존재로 상상하지 못한다는 것 아닐까.
하지만, 그녀는 너무도 쉽게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어가고 있었다.
모든 행동과 눈빛, 말투가 연기 같았다.
대본의 제목은 오로지 하나,
< 나는 비련의 여주인공 >
그리고 그녀는 반드시 그 역할을 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있어 보였다.
대사는 단 하나.
끙끙 앓는 소리로 내는 짧은 “응”이라는 대사였다.
그 쉬운 대사가 왜 이리 어려워 보이는 것일까.
숨을 헐떡인다. 천식이 있나?
그녀의 입에서는 표현이 전부 다른
여덟 번의 “응”이 지나가고 있었다.
억양과 감정이 다른 그녀는 프로인가?
아니다. 그냥 아마추어다.
숨을 고르고 감정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그 연기가
단 한 줄의 대사보다 더 버거워 보였다.
어쩌면 잘 울기만 하면 되는 역할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드러낼 때마다
그녀의 손끝은 발레리나처럼 아름다워야 하나 보다.
보이지 않는 감독의 주문인지,
스스로의 연기에 대한 집착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이리저리 비틀며
무용수의 손끝 같은 가녀린 형상을 만들려 애쓰고 있었다.
그 손끝엔 이미 경련이 번지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분명히 봤다.
어디가 아픈 걸까?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꺾고 또 꺾더니,
끝내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슬픔을 빚어낸다.
빛바랜 전봇대에 기대 운명 같은 자태를 연출해냈다.
박수를 칠 뻔했다. 생각보다 그럴싸해서.
허무주의라도 유행하는 계절이었다면 모를까,
노골적이라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죽일 듯이 소리치던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딱!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다.
내 한계도 거기까지였다.
그 남자의 한 마디.
“난 너뿐이야.”
그 마지막 대사가 끝나자 순간, 내 성질이 터졌다.
“왜...어? 새해 아침부터 지랄들이야, 어? 남의 집 앞에서 시끄럽게...
둘이 어딜 들어가서 싸우던지... 사랑을 하든지... 어? 안 들리냐? 죄송하면 꺼지라고 이 새끼야....”
창가에 기대 턱을 괸 채, 시조처럼 읊어주고는
담배를 물고 그들을 노려본다.
황당한 눈빛을 주고받던 두 사람.
그녀는 완벽한 손가락을 만들어 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남자의 품으로 숨어든다.
어이가 없어, 나는 이빨 사이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본다.
울부짖고 죽도록 싸우던 둘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사라지는구나.
징그러운 것들.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싶지도 않았다.
길을 잘 모르는 거 같아 방향이라도 표시해 주려고
그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어 주었다.
휴일 아침,
간신히 든 잠은, 구역질 나는 사랑싸움 소리에 깨졌다.
나는 담배를 물고 창문을 열어 그 연극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결국 입에 문 건 담배뿐이었다.
달팽이 같은 것들.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는 남자의 입이 무언가 욕을 뱉는 듯했다.
나는 입술도 읽으니까.
따라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모퉁이로 사라지는 그들에게 지난밤 꿈의 보상 따위를 받을 생각은 없었다.
앞에서 하지, 븅신....
여자는 여전히 비련의 여주인공으로 남자의 품에 안긴 채
가녀린 척을 하며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 버렸다.
그다음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저런 것들엔 관심이 없으니까.
지겨운 연극.
휴일의 아침,
내 유일한 비극은 닭 소리도 알람시계를 들고 다니는 까마귀 소리도 아닌
그 흔해 빠진 사랑싸움의 소음이었다.
건너편 건물을 보니 이웃 아줌마는 이미 시골에 내려가신 모양이다.
오히려 나한테 걸린 게 다행이었다.
간신히 잠든 새벽,
꽤 괜찮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그걸 깨운 건
로미오도 줄리엣도 아닌 어설픈 대사 놀이였다.
하필이면 우리 건물 앞.
가끔 고등학생들이 담배 피우는 그 자리.
가로등과 나무가 배경이 되어주는 완벽한 무대.
가장 완벽한 조명을 받는 자리.
고삐리들이 찾아와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면
가끔씩 창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고 응시한 뒤
침을 뱉어주고 쫓아 주기도 했지만
오늘은 유독 역겨웠다.
그걸 왜 보고 있었던 걸까.
사랑이란 블랙코미디 조차가 되질 못하는 것.
유일한 비극은 이런 것이 아닐까를 생각했다.
양을 세기엔 이미 늦었고
이미 눈은 버렸다.
연기도 더럽게 못하는 비련의 여주인공을 봐버렸다.
시간은 아침 일곱 시를 향해 간다.
다시 잠들긴 글렀다.
그래서 이렇게,
휴일의 아침을 시작한다.
여자와 남자.
로미오와 줄리엣.
고전도 싫고
현대도 싫다.
휴일의 아침부터.... 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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