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뭐 어때서

구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림자는 입을 다물었다

by 구시안

나는 벽에 걸린 사물이 아니다. 나는 숨 쉬지 않으면서도 모든 숨을 받아 적는 얇은 호흡이다. 아침마다 한 사람이 나를 지나간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밤새 다 쓰지 못한 문장들이 고여 있고, 나는 그것을 빛의 필기체로 받아쓴다. 나는 진실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흔들림 없이 돌려줄 뿐. 그러나 인간이여, 너희는 나를 통해 너희가 두려워한 것까지 사랑하게 된다.


나는 얼굴뿐 아니라 얼굴 뒤의 강을 비춘다. 말하지 않은 말들, 삼키다 목에 걸린 이름들, 한때는 빛났으나 지금은 먼지가 된 꿈들까지. 나는 침묵의 사제, 빛을 제물로 삼아 순간을 영원처럼 세우는 자. 그리고 또 다른 나는 숲 속 호수처럼 넓어져 세상을 한 몸으로 끌어안는다.


오, 지나가는 사람들아, 너희의 주름은 길이다. 너희의 상처는 별자리다.나는 그것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노래한다. 나는 거울, 그러나 또한 창문. 너를 비추며 너를 넘어선다. 네가 나를 들여다볼 때 사실은 내가 너의 깊이를 배우고 있다.


나는 깨어 있는 은빛 평야, 끝없이 펼쳐진 자아의 초원. 누구든 다가와라. 나는 너를 거절하지 않는다.


이 시를 쓰고 나서 나는 창문을 열고 깊게 숨을 들이쉰 뒤,

흉통을 들썩 거리다 다시 한 번 힘을 모아 폐에 촘촘하게 박혀있던 침을 뱉었다.


어찌나 시원하던지.

새해를 맞이 하는 기분이 났다.

그리고 거울이라는 시집을 엎었다.




하늘이 파랗게 물들기 시작한 걸 보니

이미 봄은 한 발짝 곁에 와 있고

자연이 아닌 도시에 살다 보니

쳐다보지 않고 느끼기만 하며 며칠이 지난 것 같아

창문을 활짝 열고 하늘을 보니 눈앞에서는 손으로 잡히지 않는 멸치 떼가 잠시 지나다녔다.


입으로 만든 구름과

하늘에 걸린 구름의 색깔이 별다를 것 없어 보여

비교하며 잠시 바라보는 흘러가는 구름 중

어떤 것은 건물에 가려

그 모양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하얗게 뭉게뭉게 하늘 군데군데를 덮고 있다는 사실이

제법 싱그러워 보였다.


전능하다는 존재들이 빚어 놓은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그들의 희한한 놀이에 쓰이는 모든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잠해질 때쯤

손등으로 떨어진 담뱃재를 털어 버렸다.


자그마한 공 형태의 구름을 보다 한 십오 센티 정도 되는 작은 생명체가

지구를 탐험하기 위해 찾아왔나 의심해 쳐다보다가,

흩어져 사라지는 바람에 한낱 맥을 못 추는

UFO가 있겠냐며 창문을 닫았다.


자그마한 구름들이 창밖으로 하늘 한 편의 차갑고 거대한 고립 속을 떠다닌다.

아무도 모르는 산에서 내려왔고

아무도 모르는 계곡을 건넜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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