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 무료

scaredy-cat : 겁이 많은 사람

보고 싶다는 또 다른 말

by 구시안

잠시 웃음이 났다.

오랜만에 걸려온, 호주에 사는 오래된 친구 녀석이었다.


“Why are you such a scaredy-cat?”


나의 대답은 당연히


“fuck you.”


놀러 오라는 친구의 말은 늘 간단하다.
호주를 가려면 얼마가 필요한지,
시간을 얼마나 비울 수 있을지,
회사와 나와 현실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고민이 오갈지 모른 채
그저 보고 싶다는 말 한마디면 되는 줄 아는 녀석은
넌 왜 이렇게 겁이 많냐고 물었다.

그래서
영국식 발음으로, “폭유”라고 답해줬다.


어쩌다 너는 다른 나라에 가서 살게 되었냐고,
명절이면 향수에 젖지는 않느냐고.

너나 나나 더러운 요식업판에서 버티며 사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신세한탄을 하면서도,

그래도 오늘 하루를 보람차다고 말하는 녀석이었다.

그리고 보고 싶다고 했다.
나도 보고 싶다고 했다.
여름을 한번 기대해 보자고 했다.

한국을 방문했을 때 녀석은
5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자기가 사는 곳으로 와야 한다는 이상한 계약을 걸어두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지 벌써 십 년.
그 사이 녀석은 여섯 번이나 한국에 와
3박 4일씩 나의 말동무와 술동무가 되어주었다.


누군가를 쉽게 들이지 않는 나의 공간에
유일하게 허락된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게 돌아가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오래 힘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 주변엔 전부 꼴보기 싫은 사람들 뿐인데

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전부 다 먼 곳에 사는 것일까.

길게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출근 준비를 하며
현장에 입고 나갈 유니폼을 빳빳하게 다린다.

나의 명절은 끝났고
내일부터

현실은 다시 풀가동될 것이다.


석양이 지나간 수면 위에 남은 잔광처럼
어딘가 마음에 남아 있는 빛 비슷한 것이
지친 심장에 맴돌겠지만,

나는 여전히
나만의 호수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쉬는 시간이면

이상한 글을 쓰고 있겠지.

적어도 나는 이 모든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하루는

또 거짓말처럼 지나가겠지.

우리의 삶이 너무 비참해
누군가와 함께하지 못할 일도,

타인의 삶이 너무 비참해
그들과 함께하기를 두려워할 일도 없을 테지만,

마음 한 구석에
해독되지 않은 독처럼 남아 있는 무언가는
여전히 서서히 퍼져 있는 듯했다.

나에게도 아직 이런게 남아 있었나.


여름에는 너를 보러 갈 수 있을까.

서로 마주 앉아
“늙었네.”를 몇 번이나 말하겠지.

그래도
네 미소를 보며 바라보는 시드니의 석양은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모를 일이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니,
기약 같은 건 하지 말자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잠시,

어린 시절

겁쟁이처럼 입을 삐죽거리며 도망가던
그 녀석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웃을 수 있다는 게
어딘가 다행이다.

참 희한한 인연이다.


감정이 늘 강하다고 말해도
너는 비련의 여주인공일 뿐이라고 말하겠지.

하지만 감정 앞에서는
누구나 성별을 잊고
그저 스며드는 존재가 된다.

겁쟁이 같은 사람.
겁쟁이 같은 인간.


어쩌면 우리는
그저 그렇게 물들어가고 있을 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거기에까지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그런 것에까지 관심을 두고 싶지 않으니까.


나이가 들어도
서로의 장난기는 여전할 것이다.

우리는
또 보자라는 말을 대신해

여전히 “폭유”를 날리며
전화를 끊을 테니까.


너나 나나
겁쟁이 같은 인간일 뿐이다.


새해에는 지겹다는 말을

집어 치우기로 했다.

그러니 너도

너의 자리에서 행복하길.


"폭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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